[시온의 소리] 개혁과 선교, 풀뿌리 운동을 꿈꾸다

입력 2017-06-09 00:05

마르틴 루터는 1517년 면죄부 판매 등 중세 로마가톨릭교회의 비진리성을 고발하는 95개 조항의 ‘양심선언문’을 비텐베르크 성(城) 교회 문에 내걸었다. 이곳에서 촉발된 개혁의 물결은 유럽 전역에 엄청난 파급효과를 가져왔고 개신교회를 탄생케 했다.

유럽 개혁운동의 계보는 루터나 장 칼뱅 이전 12세기 중후반에 활동한 페트루스 왈도(Waldo)로 거슬러간다. 십자군운동으로 영적 암흑기가 절정에 달했던 당시, 남유럽에서 시작된 왈도 추종자들(왈도파)의 지속적 개혁운동이 훗날 개신교회를 태동시킨 뿌리였다.

“해 아래 새것이 없다”(전 1:9)는 전도자의 말은 개혁운동에도 적용된다. 하나님의 진리가 인간의 죄로 굴절되고 오용되다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는 타락과 개혁의 순환은 기독교 2000년 역사뿐 아니라 구약시대부터 반복돼온 현상이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다른 옷을 입고 나타날 뿐, 그 악순환 또는 선순환은 근본적으로 다를 바 없다.

개혁이란 본질의 회복을 의미한다. 무엇을 개혁하고자 한다면 그 근거와 기준이 필요하다. 기독교에서 개혁의 기준은 진리의 표준자(Canon)인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전을 수리하다 발견한 율법책으로 개혁운동을 일으킨 유다왕 요시아를 비롯해 교회 역사에 등장하는 다양한 개혁자들은 한결같이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를 외쳤다.

왈도파가 붙들었던 세 가지 핵심 원리는 성경의 중심성, 자발적 빈곤을 통한 나눔, 만인제사장직이었다. 신을 이용해 사리사욕을 추구하는 인본주의 종교와 달리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을 십자가의 도를 구현하는 선교적 공동체와 자발적 빈곤을 통한 나눔으로 이끌었다.

성직은 교황이나 사제의 독점물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에게 주신 보편적 사명(만인제사장직)임을 깨닫게 했다. 왈도파를 포함한 모든 개혁자들이 목숨 걸고 되찾은 만인제사장직을 자진 반납한 현대 교회의 숙제는 이 존귀하고 준엄한 부르심의 회복일 것이다.

종교개혁은 근본적으로 성직주의에 대한 반동이었다. 타락한 기독교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하신 참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자리에 종교지도자를 앉히고 떠받드는 신성모독을 자행해왔다. 그가 교황이든 사제든 목사든 부흥사든 문제는 동일하다. 만인제사장직을 내세운 개혁운동의 기초 위에 세워진 개신교회가 소위 ‘목사교’로 전락하고 말았다면 로마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가 다른 게 무엇인가.

복음의 증인됨이 목회자의 독점적 역할일 수 없듯, 세계선교의 과업은 선교사의 독점적 역할일 수 없다.

목회나 선교 영역에 전임사역자가 불필요하다는 게 아니다. 예수의 지상명령은 전임사역자들을 많이 배출해 성취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구석구석 스며들어 선교적 삶을 살아낼 때 가능해진다.

이스라엘 백성 자체를 ‘제사장 나라’(출 19:6)로 부르신 의미를 선교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세계선교의 남은 과업은 더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는 데 있지 않다. 바울과 바나바 같은 선교사들이 로마제국에 복음을 확산시키는 데 기여한 바는 극히 일부분이었다. 신약성경은 오히려 제국 곳곳에 흩어진 디아스포라 성도들의 풀뿌리 선교운동의 결과라고 증거한다.

세계화 현상으로 땅끝이 우리에게 다가오고 우리가 땅끝으로 다가가고 있다. 풀뿌리 선교운동이 더욱 극대화될 수 있다. 베드로는 산지사방에 흩어진 풀뿌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권하고 있다.

“여러분은 택하심을 받은 족속이요, 왕과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민족이요,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자기의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하신 분의 업적을, 여러분이 선포하는 것입니다.”(벧전 2:9, 새번역)

정민영 (성경번역선교회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