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틴 루터 앞에 얀 후스(1372∼1415)가 있었다. 뒤에는 장 칼뱅(1509∼1564)이 있었다. 종교개혁의 길을 낸 것은 루터지만, 혼자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 체코의 후스는 종교개혁의 토대를 닦았고 프랑스의 칼뱅은 그 길을 평탄하게 만들었다.
백조 앞 거위
지난달 29일(현지시간) 체코 프라하. 구시가 광장 한복판에 우뚝 선 후스 동상에 비둘기 떼가 날아들었다. 낮 기온이 29도까지 올라가고 햇살이 쏟아진 탓인지 동상 주변에는 관광객이 많지 않았다. 바로 옆 독일에서 루터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행사가 대대적으로 진행중인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웅장한 분위기의 동상은 후스 순교 500주년을 맞은 1915년에 세워졌다. 동상 아래에는 체코어로 ‘서로 사랑하십시오. 모든 이들에게 진리를 요구하십시오’라고 쓰여 있다. 후스가 감옥에서 체코인들에게 보낸 편지에 적힌 말이라고 한다.
후스는 루터보다 100여년 먼저 교황의 면죄부 판매를 비판한 선구자다. 후스가 프라하대학에서 학사 학위를 받던 해인 1393년 교황은 면죄부를 판매한다. 후스는 성서를 유일한 권위로 삼아 교회의 세속화를 비판했다. 교황은 1411년 3월 후스의 파문을 선포했다. 후스는 1412년 프라하를 떠나 망명길에 올랐다. 망명 중에도 사람들이 모인 곳이면 어디서든 체코어로 설교했다.
후스는 1415년 7월 6일에 독일 콘스탄츠에서 소집된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돼 사형선고를 받고 그날 바로 화형을 당했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오늘 당신들이 거위(후스를 지칭) 한 마리를 불에 태우지만, 내 뒤에 나올 백조를 태울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로부터 100여년이 지난 1517년 루터는 후스의 예언을 실현하듯 ‘95개 논제’를 비텐베르크 성 교회 대문에 붙였다.
후스의 흔적은 독일 아이슬레벤에 있는 루터 생가에서도 찾을 수 있다. 루터 생가에는 백조상이 전시돼 있는데 후스가 처형당하면서 했던 ‘백조’ 발언을 상세히 기록해놓고 있었다.
프라하에는 개신교와 관계 깊은 역사적 장소가 또 있다. 후스 동상 남쪽으로 80미터 가량 떨어진 도로 바닥에는 아라비아 숫자와 십자가가 표기돼 있다. 체코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에 복속된 후, 프로테스탄트 지도자 27명이 구시청사 앞에서 처형당한 것을 추모하기 위한 길이다. 바닥에는 처형당한 날짜(1621년 6월 21일)와 27개의 십자가가 표기돼 있다. 지금은 도로 보수 공사로 절반 정도가 가려져 있다.
피난민의 방패
지난 1일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쁘띠 프랑스’에서 나와 작은 다리 를 건너자 칼뱅이 목회했던 ‘방패교회(Bouclier Church)’와 거처가 나왔다. 칼뱅은 1538년 9월 스트라스부르에 도착해 프랑스 난민을 위한 최초의 개신교 교회를 세웠다. 바로 방패교회다.
방패교회는 좁은 골목 안에 있어 지도를 몇 번이나 확인해야 찾아갈 수 있었다. 교회 외벽 문패에는 ‘세계화 반대’ 등이 적힌 정치 선전물이 더덕더덕 붙어 있었다. 현재 교회 건물은 칼뱅 사후에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알리는 현판에 ‘칼뱅이 목회했다’는 내용이 적혀있어 겨우 이곳이 방패교회라는 점을 알 수 있었다. 교회 인근에는 칼뱅이 머물렀던 주택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독일과 인접한 스트라스부르는 유럽의회가 있는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칼뱅과도 인연이 깊다. 칼뱅의 주 무대는 스위스 제네바지만 그가 프랑스 개신교 피난민들을 위한 교회를 세운 곳은 스트라스부르다. 현재 프랑스 소속인 스트라스부르는 당시 어느 나라에도 속하지 않는 자치도시였기 때문에 종교 박해를 피해 온 위그노(프랑스 신교도)가 많았다. 칼뱅은 이들의 ‘방패’가 됐다.
칼뱅이 존경했던 동지인 마르틴 부처(1491∼1551)와 아내 이델레트를 만난 곳도 스트라스부르다. 칼뱅은 1540년 스트라스부르에서 부처의 소개로 아내를 만나 결혼했다.
칼뱅은 또 스트라스부르에서 ‘기독교 강요’ 제2판(1539년), ‘로마서주석’(1540년) 등을 집필했다. 부처가 1531년에서 1540년까지 목회했던 성 토마스 교회도 칼뱅의 방패교회 바로 인근에 있다.
프라하(체코), 스트라스부르(프랑스)=글·사진 임성수 기자 joylss@kmib.co.kr, 그래픽=이영은 기자
[종교 개혁지 탐방 (下)] 순교로 뿌린 밀알, 개신교 신학 정립 열매 맺다
입력 2017-06-09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