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공짜는 없구나’ 싶었다. 러시아 관영 타스통신을 읽다가 든 생각이다. 지난달 24일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문재인 대통령의 특사로 방문한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접견했다. 한국 언론이 ‘푸틴, 북한에 특사 파견 용의’라는 뉴스를 내보낼 때 타스는 이에 대한 언급은 일절 없이 푸틴의 발언 한 구절을 소개하며 접견 소식을 다뤘다. 푸틴은 당시 “송 특사가 바랴크함 깃발을 러시아에 선물해준 걸 내가 잘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송 의원이 인천시장 때인 2010년에 인천시립박물관에 보관 중이던 바랴크함 깃발을 러시아에 대여해준 일을 언급한 것이다. 이 깃발은 1904년 러일전쟁 당시 인천 앞바다에서 일본과 싸우다 패배가 임박하자 일본에 전함을 뺏길 수 없다면서 스스로 침몰한 러시아 바랴크함에 걸려 있던 것이다. 러시아 민족의 자존심이 깃든 유물이다.
기억에 남는 선물은 이처럼 외교에 큰 힘을 발휘한다. 지난해 11월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자마자 방미한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골프채를 선물했을 때도 그런 생각을 했다. 골프광인 트럼프를 들뜨게 만들었고, 동반 라운딩까지 이끌어낸 선물이었다.
그런데 2개월 뒤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가 방미해 트럼프에게 준 선물을 보고선 어쩌면 아베보다 더 고민했겠다 싶었다. 메이는 트럼프에게 스코틀랜드 전통 그릇인 케익스를 선물했다. 트럼프가 스코틀랜드 출신 어머니를 아주 존경했고, 자신이 스코틀랜드 혈통인 걸 자랑스러워한다는 사실을 알고 고른 선물이었다. 메이는 영부인 멜라니아에게는 더 정감 있는 선물을 줬다. 자신의 시골 별장이 있는 버킹엄셔 체커스산(産) 사과주스와 자두잼, 레몬잼, 베이크웰 타트(밀가루 반죽을 안 씌운 파이), 크랜베리 초콜릿 등을 한바구니 가득 건넸다. 소박하지만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건 다 담았다. 멜라니아와 딸들이 ‘와우’와 ‘원더풀’을 연발했을 것이다.
메이의 선물 외교는 지난해 7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의 첫 만남 때도 돋보였다. 당시 메이는 유럽인들이 한번쯤 걷고 싶어 하는 영국 북부 해안길 트레킹 책과 웨일스의 유명한 산인 스노돈 등산 이야기를 다룬 책 2권을 선물했다. 트레킹광 메르켈이 펄쩍 뛰게 좋아했다. 그 나흘 뒤가 메르켈 생일인 걸 알았던 메이는 직접 쓴 생일축하 카드를 책 속에 살짝 넣어뒀다.
선물은 방문국 전체를 위로해 주기도 한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그런 선물을 잘 챙겼다. 오바마는 세월호 참사 열흘 뒤인 2014년 4월 말 방한했을 때 ‘잭슨 목련’ 묘목을 갖고 와 안산 단원고에 전달했다. 미국의 제7대 앤드루 잭슨 대통령이 먼저 세상을 떠난 부인을 그리워하며 백악관에 심은 나무다. 오바마는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분들께 깊은 연민을 전한다’는 메시지도 건넸다. 오바마는 지난해 5월 원폭 피해지인 일본 히로시마를 방문해서는 직접 접은 종이학 4마리를 선물했다. 과거 한 피폭자가 종이학 천 마리를 접으면 병이 나을 것으로 생각했다는 사연을 듣고 히로시마 시민들에게 선물한 것이다.
‘선물’이 곧 메시지가 되기도 한다. 지난달 프란치스코 교황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건넨 평화를 상징하는 올리브 나무가 장식된 메달과 환경보호를 강조한 책 선물이 그랬다. 트럼프의 반이민, 반환경 정책을 철회하라는 메시지였다.
문 대통령이 이달 말 첫 한·미 정상회담을 한다. 대북접근법, 사드 배치, 한·미 자유무역협정 등을 둘러싸고 긴장감 높은 회담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럴 때일수록 분위기를 누그러뜨릴 ‘소프트 외교’가 절실하다. 트럼프는 앞으로도 4∼5년을 더 파트너로 지내야 할 정상이다. 첫 방문 때 그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 굳이 선물이 아니어도 좋다. 트럼프와 가족들을 감동시킬 만한 말이나 이벤트, 배려면 된다. 양측의 다정다감한 모습과 흐뭇한 이벤트는 향후 양국이 돈독한 관계를 이어가는 데 두고두고 효과를 발휘할 것이다.
손병호 국제부장 bhson@kmib.co.kr
[데스크시각-손병호] 베이크웰 타트 파이
입력 2017-06-07 18: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