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세먼지와 원자력발전소의 안전성이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면서 ‘에너지 4.0 시대’는 예상보다 빨리 시작됐다. 업계가 4차 산업혁명 관련 첨단 기술을 접목해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는 가운데 김진우 전력정책심의위원장(전 에너지경제연구원장)은 6일 “신산업이 움직이려면 수요자의 선택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4차 산업혁명으로 발전사들이 신재생에너지를 만들고 전력업체가 지능형전력량계(AMI) 등 송·배전 방식을 획기적으로 바꾸더라도 전력 수요자가 이를 외면하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김 위원장은 “신산업의 성장은 수요자와 공급자 간 역동성이 가장 중요하다”며 “사업자는 수요자 선택을 받기 위해 투자를 하고 기술 개발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보안 문제도 풀어야 할 과제로 꼽았다.
세계 시장 선도, 늦지 않았다
한국은 미국 독일 일본 등 다른 나라에 비해 인공지능(AI)이나 빅데이터 등 4차 산업혁명 관련 주요 기술은 뒤처진 상태다. 하지만 강력한 정보통신기술(ICT)을 바탕으로 연구·개발(R&D)에 집중한다면 언제든 앞선 나라들의 기술력을 따라잡을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이미 민간 발전사들이나 한국전력 등은 전문 인력을 양성하고 R&D에 집중 투자하고 있다.
김창섭 가천대 에너지IT학과 교수는 “기술력이 바탕이 돼야 그 다음에 제도 개선이나 민관 협력도 할 수 있는 것”이라며 “산·학·연이 역할 분담을 해서 자기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야 R&D 효과를 높일 수 있다”고 말했다.
서울대 공대 김희집 교수는 “미국은 AI와 빅데이터 기술이 앞서 있고 한국은 통신 기술이 앞서 있다”며 “한국은 기술 교류로 미국의 AI와 빅데이터 기술 노하우를 전수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확보한 기술을 통한 새로운 비즈니스 창출도 고민해야 할 부분이다. 제조업체인 미국의 제너럴일렉트릭(GE)은 항공기 엔진에 센서를 달아 운항 정보를 수집·분석해 연료 절감과 최적의 유지·보수 솔루션을 제공하는 컨설팅 서비스업으로 영역을 넓혔다. 이미 발전사들은 첨단 기술을 접목한 발전소 운영 노하우를 세계 시장에 수출하는 것을 미래 성장동력으로 삼았다. 한전은 자사가 축적한 빅데이터로 사업을 다각화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새로운 비즈니스는 일자리 창출로 연결될 수도 있다.
권동명 연세대 환경공학부 연구교수는 “기술과 일자리가 결합한다면 에너지산업은 4차 산업혁명의 중요 산업군으로 자리 잡을 것”이라고 전했다.
이 같은 계획을 실행하려면 우선 해결해야 할 게 있다. 기술 표준화다. 전력을 만들어 송·배전하고 판매하는 전 과정이 상호 호환될 수 있어야 하고 해외 시장에 진출하려면 글로벌 표준에 맞추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에너지산업 규제도 네거티브로 전환해야 한다.
김진우 위원장은 “한국은 업종 간 진입장벽이 높아 자유로운 사업자의 진출입이 막혀 있고 전기요금 등은 경직적”이라며 “규제로 인해 역동성을 발휘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사이버 테러 취약…과제는 보안
2010년 6월 이란 핵발전소 원심분리기가 이상 징후를 보이면서 멈춰섰다. ‘올림픽 게임즈(Olympic Games)’라 명명한 미국과 이스라엘의 사이버 공격이었다. 악성코드 스턱스넷이 이란 핵발전소를 공격한 이후 기반시설에 대한 공격은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2014년 12월 전력시설에 사이버 공격이 가해졌고 2015년 말 우크라이나는 블랙에너지라는 악성코드에 의한 사이버 공격으로 22만5000가구가 정전됐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2012년부터 2016년 7월까지 산업부 산하 공공기관 중 가장 많은 해킹 시도를 당한 곳은 한국수력원자력으로 1119건에 달했다. 5위권 안에 3곳이 한수원을 비롯해 한전KPS(891건), 한국전력(721건) 등 에너지 기업이었다.
이처럼 전력은 국가 산업의 기초가 되는 기간산업인 만큼 끊임없이 해커들의 타깃이 되고 있다. 4차 산업혁명으로 접어들면서 사이버 위협은 더 커지고 있다. 거대한 정보의 집합인 빅데이터가 해커들에 의해 외부로 유출되거나 악성코드로 센서가 오작동할 경우 경제적 피해는 물론 안전까지 위협받을 수 있다.
한국동서발전은 보안의 정석을 보여주고 있다. 2014년부터 국제 정보보호 경영 시스템(ISO 27001)을 도입해 운영하고 있다. 발전산업 4.0 보안체제를 구축했고 AI, 사물인터넷(IoT), 빅데이터 등 최신 ICT 기술을 활용한 보안 시스템도 갖췄다. 2015년엔 정보보안 우수기관 대통령 표창과 산업통상자원부장관상을 받기도 했다.
김희집 교수는 “기술이 발전할수록 사이버 보안도 취약할 수밖에 없다”면서 “첨단 기술은 보안을 확보하는 데도 활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세종=서윤경 기자 y27k@kmib.co.kr
■ 이민화 KAIST 초빙교수
“ESS 분야 비전 없으면 경쟁서 밀릴 것”
4차 산업혁명이란 거대한 흐름 앞에 에너지업계도 대책 마련에 분주하다. 석탄화력발전 등 전통적인 에너지에서 신재생에너지로의 전환 과정에 4차 산업혁명이 맞물려 있어서다. 과제를 풀기 위해서는 명확한 목표 제시가 우선돼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특히 신산업 성공은 일자리 창출 여부와 맞닿아 있기 때문에 더욱 중요하다고도 강조한다. 지난달 8일 서울 도곡동 KAIST 도곡 캠퍼스에서 만난 이민화(사진) KAIST 초빙교수는 “에너지 비전이 있어야 한다”는 말로 정부 정책의 방향성 제시를 주문했다.
벤처 1세대로 한국벤처협회 초대 회장을 역임한 이 교수에게 4차 산업혁명은 낯설지 않다. 그가 산업현장에 있을 당시 한국경제를 주도한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생태계가 오프라인으로 뛰어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터넷과 현실이 결합한 사물인터넷(IoT)이나 인공지능(AI) 등이 대표적이다. 이 교수는 “필요할 때와 장소에 필요한 사람에게 최적화된 재화와 서비스가 공급되는 사회”라고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설명했다.
에너지 분야 역시 이 교수 말처럼 4차 산업혁명이 가져올 최적화가 핵심 키워드다. 같은 비용으로 더 많은 에너지를 생산하고 낭비를 없애는 일이 결국 에너지 공급자나 소비자의 이익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다만 수단은 바뀔 수밖에 없다고 그는 평가한다. 석탄이나 석유, 원자력 등 지금까지 에너지 분야를 이끌어왔던 에너지원은 미세먼지 등 환경 문제의 부각으로 설 자리를 잃어 가고 있는 게 사실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 에너지의 최적화를 재생에너지가 이끌 거라고 이 교수가 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교수는 “에너지 한계비용을 ‘제로’로 떨어뜨리는 게 4차 산업혁명의 목표이며 이는 탈화석 에너지를 쓰겠다는 것”이라며 “문제는 한국이 전 세계에서 이 분야에 가장 후진 국가라는 점”이라고 꼬집었다.
한국에너지공단 ‘신재생에너지 보급 통계’에 따르면 2015년 기준으로 전체 발전량 중 신재생에너지가 차지하는 비중은 6.61%에 불과하다. 그나마도 해외에서 재생에너지로 인정하지 않는 바이오매스나 폐기물을 합한 수치다. 태양광 등 재생에너지만으로 전체 발전량의 절반가량을 대체한 독일과 비교하면 처참한 수준이다. 해당 분야에서 새로운 일자리를 만드는 작업도 이러한 현실 때문에 유독 한국만 더디다고 이 교수는 진단했다. 이 교수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큰 재생에너지 사업 영역은 태양광과 에너지저장장치(ESS) 분야”라며 “온라인과 현실이 융합하는 지점이 바로 ESS”라고 짚었다. 이어 “한국이 이 분야에 대해 비전을 가지지 않으면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에너지 분야 경쟁에서 뒤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는 결국 민관이 힘을 합쳐야 한다는 게 이 교수의 제언이다. 정부가 관련 규제를 완화해 4차 산업혁명 토대를 만들고 기술은 민간에서 개발하는 형태의 선순환이다. 이 교수는 “제도가 길을 열어주면 기술이 민간 영역에서 융합할 것”이라며 “정부의 역할 정의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글=신준섭 기자 sman321@kmib.co.kr, 그래픽=박동민 기자
[에너지 4.0시대] “강력한 ICT로 연구개발 집중 땐 세계 시장 주도”
입력 2017-06-07 0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