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공간] 자연과 생명을 품으니 세상 속에 스며들었다

입력 2017-06-06 00:01
충주백석으로 외관을 마무리한 서울 서대문구 봉원교회 본당 모습. 경사지를 거스르지 않고 교회를 지었다. 신현가 인턴기자
1988년 입당한 현 봉원예배당 건축 스케치.
봉원교회 박용권 담임목사가 지난 1일 교회 텃밭에서 생태 목회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교회 부속 어린이도서관 옥상을 이용한 논에 5월 중순 모내기를 마쳤다. 교회 봉사관 벽에 걸린 1950년대 말 교회 개척 당시 사진(위부터). 신현가 인턴기자
1981년 학사건립준비위원회를 구성한 이후 2015년 기공감사예배를 드린 봉원학사. 신현가 인턴기자
서울 도심 교회 옥상에서 모가 자라고 있었다. 30일 전에 파종하여 육묘, 최근 13㎡ 넓이 옥상 논에 이앙했다. 수위 3∼4㎝ 정도의 물이 찰랑찰랑했다. 이앙하던 날 주일학교 아이들이 제일 신나했다. 서울 서대문구 봉원동은 사하촌이었다. 1960년 봉원사라는 큰 절로부터 교회부지를 매입했다. 지금도 봉원사 땅 숲이 교회 뒤편에 울창하다.

지난 1일 봉원교회 예배당을 찾았다. 서울 이화여대와 연세대 캠퍼스 사이로 성산로가 광화문 방향으로 나 있고 그 길을 따라 가다보면 봉원고가차도와 금화터널이 나온다. 그 고가차도와 터널 왼쪽 산자락 일원이 봉원동이다. 295m 높이 안산자락 줄기에 형성된 마을이다.

봉원예배당은 한적한 주택가 언덕에 돛배 형태로 다소곳하게 들어 앉아있다. 세월을 머금은 단독주택이 빈부 편차 없는 공동체 마을의 편안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주민은 서로 지나며 환한 웃음으로 인사를 빼놓지 않는다. 경사를 활용해 들어선 봉원예배당 현관에 서서 보면 고가 건너 적벽돌의 대신교회와 미션스쿨 이화여대 금란고 등이 들어온다. 교회 오른쪽으로는 연세대 총장공관이 들어선 학교 숲이다. 새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봉원예배당 본당은 충주백석으로 마감했다. 거친 것 같으면서도 기품이 있는 백석 건축의 장점은 세월이 지나도 새 건축물 같다는 점이다. 1988년 12월 25일 성탄절에 입당했다. 봉원예배당은 우리가 익히 보아왔던 교회의 표정과 사뭇 다르다. 높이 솟은 첨탑과 그 첨탑 끝에 십자가의 전형적 형식을 취하지 않았다. 고딕풍 수직창과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로 전면 처리를 하지도 않았다.

교회건축가의 고민을 축약하면 두 가지라고 한다. 교회를 하나님이 중심이 된 공간으로 인식하느냐, 아니면 인간 생활이 중심이 된 공간으로 간주하느냐 대한 갈등.

봉원예배당은 이 고민을 낮은 자세로 해결했다. 높이 솟아오르는 형태를 버리고 하나님과 공동체 앞에 무릎 꿇은 ‘마음의 건축’을 담았다. 대신 본당 안에 하나님의 빛을 최대한 끌어들여 경건이 우러나오도록 배려했다. 본당 안 충주백석과 백색타일은 그러한 빛을 안내하는 괜찮은 재료인 셈이다. 경사를 깎아내지 않고 순응해 열린 건축을 지향하다 보니 마치 마을회관 같은 개방성이 돋보인다.

봉원예배당은 교회건축의 명가 정림건축이 설계했다. 당시 팀원으로 활동했던 건축가 임진우(서울 나들목교회)씨는 이 회사 대표가 됐다. 그는 지난 2일 “자연녹지경관에다 건폐율도 높게 안 나오고, 더구나 경사여서 쉽지 않았다”며 “기교를 부리지 않으면서 예배당의 성스러움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은 빛을 머금고 들어가는 것이었다”고 회상했다. 아름다운 자연을 밀어내고 싶지 않아 나무 한 그루에도 의미를 두었다. 그 벚나무가 지금은 아름드리가 되어 교회 이미지가 됐다.

이러한 자연 친화성은 세상에 우뚝 선 교회가 아닌 세상 속에 스며든 교회를 지향하는 봉원교회의 목회철학과 맞닿아 있다. 설립 당시 봉원동은 6·25 한국전쟁 직후 피난 온 실향민이 많이 살았다. 1958년 교회를 개척했던 이원태 전도사(현 원로목사)는 연세대 소유 땅 위에 세를 얻어 흙벽과 천막 지붕의 기도처로 출발했다. 금화터널(1979년 개통)도 뚫리기 전이라 도심 속 자연부락 같았다. 연세대, 이화여대가 담 너머여서 학교 교수 및 직원, 하숙생 등이 제법 살았다.

김용준(전 한양대 교수) 서광선(전 이화여대 교수) 등 내로라하는 학계 엘리트들이 이원태 목사와 함께 ‘지역공동체 속의 교회’의 담론을 만들어 냈다. 60∼70년대 쓰레기를 파헤쳐 먹고사는 난지도(지금의 서울월드컵경기장 일대) 주민을 위해 교회 개척을 지원했으며 교회 내 신용협동조합을 창립해 교인과 주민의 자립을 도왔다. 미혼모 시설 애란원도 지원했다. 이들은 또 민청학련 사건과 같은 시국사건으로 구속된 교우와 해직교수 등을 위해 기도하고 도왔으며 그러면서도 영성의 깊이를 위해 빌립모임 등을 통해 신앙의 자세를 다졌다. 이 전통은 지금도 이신행 교수(연세대 명예교수) 등에 의해 ‘풀뿌리사회지기학교(대안대학)’ ‘신촌민회(좋은마을만들기)’ 등과 같은 기독교 가치를 바탕을 둔 운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한편 이원태 목사는 후배 목회자들을 위해 1999년 65세에 조기은퇴를 선언, 강원도 평창에서 은퇴목회자의 삶을 산다. 60여년 교회 역사에 지금 박용권 목사가 3대째이다. 봉원교회는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 우리에게 요구되는 고통과 책임을 분담하는 교회’를 지향해 왔다. 본당 옆 봉사관은 이러한 뜻을 담은 상징적 공간이다.

2007년 부임한 박 목사는 교회공간 곳곳에 모내기와 같은 생태운동으로 2015년 기독교환경운동연대가 주는 ‘녹색교회’의 영예를 안기도 했다. 사막화 방지를 위해 ‘몽골 은총의 숲 후원의 밤’행사를 개최했으며 교회 기구 환경보전위원회라는 직제도 있다.

“교회에서 기른 곡식으로 추수감사제와 성만찬을 합니다. 교회 공간은 지역의 마을회관 같아야 합니다. ‘우리 동네 교회’라는 주민의 애정은 공간의 개방성과 프로그램에서 나옵니다.”

■ 대학생 주거 도움 ‘봉원학사’
남녀 16명 학생, 지성과 영성 함께 길러



봉원예배당 입구에서 산 쪽으로 100m 떨어진 곳에 봉원학사가 있다. 역시 지세를 거스르지 않은 3층 건축물이다. 2015년 완공된 이 학사는 대학가에 위치한 봉원교회가 주거 고민을 하는 대학생들을 위해 지었다. 지금은 남녀 각 8명이 입주했다. 목사 사택은 3층이다.

봉원학사는 1981년 1월 학사건립준비위원회가 구성돼 학사헌금을 시작했으나 작은 교회 살림에 건축이 쉽지 않았다. 99년 이오복 권사가 대지를 기증하며 탄력을 받았고 2014년 정책당회에서 건축을 확정했다. 대지면적 342㎡, 연면적 496㎡이다.

앞서 교회는 원룸촌이 된 봉원동 지역 학생과 주민을 위해 2009년부터 매년 원룸청년축제를 열고 있다. 이때 학사는 열린 공간이 된다. 학사 입주 자격은 크리스천 청년으로 소득 및 원거리 여부에 따라 결정된다. 박용권 목사가 신앙 및 생활 사감이다.

글=전정희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jhjeon@kmib.co.kr, 사진=신현가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