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d 건강] 가상현실 헤맸더니 마비됐던 팔이 움직이네!

입력 2017-06-06 05:00
가상현실과 증강현실의 의료계 활용 영역이 넓어지고 있다. 가상현실 치료는 조현병이나 사회공포증 등 정신건강 문제를 해결하고 뇌졸중으로 팔다리가 마비된 환자의 재활을 돕기도 한다. 증강현실은 암 수술의 정확성을 높이고 가상수술이나 해부학 실습 등 의학 교육에 활용도가 높다.강남세브란스·분당차병원 제공
지난달 31일 연세의대 강남세브란스병원 가상현실클리닉. 기자가 입체영상안경(HMD)을 머리에 쓰자 눈앞에 많은 청중이 앉아있는 대형 강의실이 펼쳐진다. 여기저기 웅성거리는 소리도 들린다. 360도 사방을 볼 수 있어 실제 강의실에 와 있는 듯하다. 이어 눈앞 화면에 과제 패널이 나타나고 눈을 맞추자 다음 장면에서 한 남자가 나타난다. 가상현실 속 나, '아바타'다. 순간 모든 시선이 쏠린다. 손에 땀이 나고 말문이 막혀버린다. 우리가 학교나 직장에서 수없이 맞닥뜨리는 '발표 상황'이다. 이런 녹록지 않은 상황에서 정상인 같으면 어렵지 않게 넘길 수 있다. 하지만 사회 대응력이 떨어지는 사회 부적응자나 정신질환자들은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다.

가상현실 속 ‘아바타’로 공포증 이긴다

가상현실(VR·Virtual Reality)과 증강현실(AR·Augmented Reality)을 질병 치료나 수술, 의학교육에 활용하는 사례가 점차 늘고 있다. 가장 앞선 분야가 바로 정신건강의학과다.

가상현실은 3차원 환경과 시각 촉각 청각 등을 통해 실제와 같은 몰입감을 줌으로써 가상현실 속에 실제 존재하는 것처럼 느끼고 상호 작용할 수 있게 하는 기술이다. 사회생활에 애로를 겪는 사회공포증 조현병 등의 인성 재활치료 프로그램으로 도입됐다.

환자는 현실과 비슷한 다양한 가상현실 세계에서 정상적인 사회성 훈련을 받는다. 주어진 상황에 대해 환자가 적절한 답을 고르면 다음 과제로 넘어간다. 틀린 답에는 그에 상응하는 난처한 후속 상황이 전개된다. 이런 경험을 되풀이하면서 환자가 스스로 행동을 교정하게 만든다.

몇 년 전 강남세브란병원에 국내 처음 가상현실 치료 프로그램을 시작한 김재진 교수는 5일 “조현병의 경우 환청이나 피해망상 같은 급성기 증상은 약물로 치료할 수 있지만 매끄럽지 못한 대인관계 등 사회성 부족은 약물로 해결되지 않는다”며 “가상현실을 통한 반복 훈련은 이들에게 사회 적응력을 길러주는 보완 치료로 좋은 효과를 보인다”고 설명했다.

크게 가족 친구 직장 등 세 경우의 다양한 상황을 가상현실로 구현한다. 환자는 다양한 곳의 체험을 할 수 있고 바로 옆 의료진은 환자의 반응 상태(심장박동 수, 생체리듬 등)와 그 시간을 평가해 적절한 치료계획을 세운다.

지난해 이곳에선 조현병 사회공포증 등 35명(219건), 사회성 부족 7명(44건), 알코올 중독 14명(25건)에게 최첨단 가상현실을 접목해 치료 효과를 높였다.

조현병 후유증으로 심각한 사회성 결핍 상태였던 A씨도 가상현실 치료를 받고서 가족과의 관계를 회복함은 물론 아르바이트에 나설 정도로 상태가 좋아졌다. 그전에는 두려움이 많아 집 밖에 나가는 것 자체를 꺼렸던 그다. 김 교수는 “요즘 발표 공포나 대인 공포 등 사회공포증을 겪는 직장인이나 학생이 적지 않다. 얼마 전 인사말 하는 게 고역이었던 한 기업 최고경영자(CEO)가 왔는데, 10주의 가상현실 치료를 다 마친 후 직원들 앞에서 말을 술술 하게 됐다고 만족해하기도 했다”면서 “또래 모임에 끼는 데 어려움을 겪는 노인도 많이 찾는다”고 했다.

‘혐오 자극’으로 게임·알코올 중독 치료

게임·인터넷, 알코올·니코틴 중독 치료에도 가상현실을 접목한다. 중앙대병원 과몰입힐링센터, 서울시립보라매병원 중독센터 등에서 앞장서 시도하고 있다.

신모(15)군은 집이나 PC방에서 하루 15시간 이상 온라인 게임을 하느라 밤을 꼬박 새우기 일쑤였다.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 학교에 지각하거나 식사를 거르는 일도 다반사였다. 그러던 중 중앙대병원에서 가상현실 치료를 새롭게 접하게 됐다.

신군은 2개월간 8차례 가상현실 속에서 자신의 아바타를 만났다. 3D 안경을 쓰면 나타나는 화면을 통해 PC방에서 신나게 게임하는 자신을 보며 실제 게임하는 듯한 흥분을 느꼈다. 하지만 이후 화면에서는 지나친 게임으로 인해 건강이 나빠지는 모습이 보이고 미래에 대한 절망적 장면들이 펼쳐지면서 게임에 대한 혐오감을 느끼게 됐다.

신군은 “과거 게임할 때는 죄책감이나 미래에 대한 걱정이 없었는데, 가상현실 치료를 통해 미래에 대한 걱정이 생기고 죄책감도 들게 돼 게임 시간을 줄일 수 있었다”고 말했다.

20년간 술독에 빠져 아내를 폭행하는 등 심한 알코올 의존증을 보인 김모(47)씨도 이곳에서 인지행동 치료와 함께 10여 차례 가상현실을 체험한 뒤 거의 술을 끊게 됐다.

김씨가 반복해서 본 가상현실 화면에는 평소처럼 술판이 벌어진다. 술 냄새를 맡다 보면 실제 술집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김씨에게 술잔을 건넨 이는 가상현실 속 자신의 ‘아바타’였다.

술자리 장면이 끝나고 김씨는 술병이 잔뜩 버려진 쓰레기 더미에 피를 흘리고 구토를 하며 쓰러져 있다. 역한 냄새와 함께 메스꺼움이 올라오다가 마침내 김씨가 죽음에 이르러 관에 들어가는 장면으로 끝난다. 두려움과 공포감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중앙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한덕현 교수는 “가상현실 치료 중 뇌파를 측정했더니 김씨의 뇌는 가상음주를 경험하는 상태에서 일반인보다 더 흥분하며, 안정된 상태에서 뇌 전두엽에서 나오는 알파파가 줄어들었다. 이후 구토 등 ‘혐오 자극’ 단계에서는 뇌가 정상인보다 더 민감하게 반응하며 ‘갈망’이 급격히 줄면서 알파파가 증가해 흥분이 가라앉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가상현실 치료가 술 욕구를 줄여 알코올 의존성을 떨어뜨리고 재발률을 줄이는 효과가 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한 교수는 “가상현실 프로그램은 참여자가 몰입하기 쉽고 극복하기 힘들어하는 부분에 대한 맞춤형 치료가 가능하다”면서 “향후 입체 영상과 그래픽 기술이 발전할수록 치료 효과는 더욱 좋아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가상현실 치료는 이밖에 니코틴·도박 중독, 고소·비행공포증, 강박증 등 여러 정신과 질환으로 영역을 넓히고 있다.

뇌졸중 팔 마비 재활… AR로 암 수술

뇌졸중(뇌경색 및 뇌출혈)에 따른 후유증인 팔다리 마비 환자들의 재활치료에도 활용된다. 분당차병원 재활의학과 김민영 교수팀은 지난해 초부터 지금까지 뇌졸중으로 팔을 잘 쓰지 못하는 환자 162명에게 가상현실 재활치료를 진행 중이며 상당한 효과를 거뒀다고 밝혔다.

환자들이 머리에 HMD를 착용한 뒤 가상현실 바닷속에서 팔을 뻗어 사방으로 지나다니는 물고기를 잡는 방식이다. 김 교수는 “뇌는 끊임없이 자극을 주면 뇌신경이 회복되는 가소성을 갖고 있다”면서 “가상현실을 통한 시각적 자극을 통해 환자들이 재미있어할뿐더러 팔을 계속 움직이게 돼 자연스럽게 상지(上旨) 기능이 회복된다. 뇌졸중에 따른 ‘편측 시각 무시’(한쪽을 보지 못해 부딪힘 등이 나타남) 증상 극복이나 보행 훈련에도 도움 되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고 했다.

왼쪽 뇌경색으로 오른쪽 팔에 부분 마비가 온 최모(64)씨는 가상현실 치료를 받은 뒤 상지 근력이 30∼40% 향상됐고 주의력과 기억력도 좋아졌다.

분당서울대병원 정형외과팀은 가상현실보다 진일보한 ‘증강현실’을 활용해 세계 최초로 다리에 생긴 뼈암(골종양) 수술에 성공한 사례를 최근 발표해 주목받았다.

AR은 현실 세계 이미지에 3차원 가상의 물체나 정보를 겹쳐서 보여줌으로써 현실감을 더 느끼게 해 주는 기술이다. 게임 ‘포켓몬고’가 대표적이다. 의료진은 태블릿PC를 통해 환자의 신체(다리)상에 암의 위치, 크기를 실시간 증강현실 기술로 구현해주는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겉으로 보이지 않는 암 등 병변을 실제 이미지 위에 표시해 줘 수술의 정확도를 높일 수 있는 것이다.

같은 병원 외과 윤유석 교수는 “간암 수술의 경우 간 표면에 생긴 암은 내시경을 통해 파악할 수 있지만 깊숙이 생긴 종양은 육안으로 확인하기 어려워 증강현실을 이용하면 도움받을 수 있을 것”이라며 “뇌 유방 췌장 같은 장기에 수술이 필요할 때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분당차병원 김민영 교수는 “재활 분야에서 증강현실 이용은 세계적으로 아직 시작 단계이긴 하지만 환자나 노인이 집 등 실제 환경 속에서 운동 등 재활 훈련을 할 때 도움을 받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증강현실은 또 가상수술이나 해부학 실습 등 의학교육, 원격 치료 서비스 등에도 활용도가 높아지고 있다.

연말까지 VR·AR 가이드라인 제정

VR, AR 기술의 쓰임새가 의료 현장에서 점차 증가하자,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이들 기술을 접목한 의료기기의 허가 범위 및 기준 등을 정한 가이드라인 마련에 들어갔다. 식약처는 지난 4월 말 학계 산업계 의료계 등 전문가 20명으로 구성된 협의체를 발족해 2차례 논의를 진행했다.

식약처 관계자는 “의료계에서 적용되고 있는 VR AR을 단순 콘텐츠로 볼지, 의료기기로 분류할지에 대한 컨센선스도 아직 없는 상태”라면서 “앞으로 논의를 거쳐 질병치료 등 의료기기 사용 목적에 부합한 경우 그 범위와 허가 기준을 정해 올해 안에 공개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민태원 기자 twmin@kmib.co.kr, 그래픽= 이은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