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오후 9시8분쯤 서울 노원구 수락산에서 번진 산불은 13시간이 지난 2일 오전 10시52분쯤 진화됐다. 소방당국은 구청직원 경찰공무원 소방대원 등 총 2330명이 진화에 투입됐다고 밝혔지만 그들보다 더 활약이 돋보인 건 현장에서 두 팔을 걷어붙인 ‘시민들’이었다.
2일 이른 아침, 수락산 인근엔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앞치마를 한 40∼50대 여성들이 눈에 띄었다. 다들 집에서 급히 나온 듯 화장기 없는 얼굴에 편한 반팔 차림이었다. 전날 밤부터 밤새워 소방대원들에게 커피와 차를 나눠주고 컵라면을 끓이고 뒷정리를 도맡았지만 얼굴엔 피곤한 기색 하나 없었다. 오히려 환하게 웃으며 현장 분위기를 북돋았다.
이들은 119에 산불 신고가 접수되자마자 “수락산에 화재가 발생했으니 즉시 출동해달라”는 문자 메시지를 받고 스스로 나온 의용소방대였다. 노원구 주민으로 구성된 의용소방대원 206명 중 130명은 각자 할 일을 제쳐두고 산불 현장에 뛰쳐나왔다. 최초 문자가 전달된 지 30분 만에 이들 중 대부분이 모였다. 의용소방대는 자발적인 주민 조직으로 화재가 발생하면 소방관 업무를 보조하고 평상시엔 교육과 봉사를 담당한다. 직장을 다니지 않는 여성들이 80%를 차지한다.
의용소방대는 밤을 꼴딱 새우며 소방대원들을 위한 커피 녹차를 준비하고 컵라면을 나눠줬다. 소방복 물통 등 짐 옮기기와 뒷정리도 마다하지 않았다. 10년차 의용소방대원 지미숙(52·여)씨는 “집에 있다가 호출을 받고 대원 조끼 하나만 급히 걸치고 나왔다”며 “한숨도 못 자고 오늘 아침에야 집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하나도 힘들지 않았고 오히려 즐겁게 일했다”고 말했다. 노원소방서 관계자는 “다들 갑작스럽게 연락을 받았을 텐데 130명이나 모여서 놀랐다. 현장에서 직접 불을 끈 소방대원들 못지않게 의용소방대원들의 활약이 빛났다”고 말했다.
평범한 시민들의 활약도 돋보였다. 노원구에 사는 황창화(58)씨는 수락산 근처에서 지인들과 술을 마시다 소방차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산불이 난 것을 알았다. 그리고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지인 3명과 함께 한 손엔 등짐펌프, 다른 한 손엔 곡괭이를 들고 산에 올랐다. 황씨는 “처음엔 위험하다는 생각보단 어서 현장에 힘을 보태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고 말했다. 지금은 고등학생인 아들이 어릴 적 나무에 새집을 다는 등 수락산에 남다른 추억이 있다는 오영훈(57)씨도 창밖의 불길을 보자마자 바로 나와 30∼40명의 시민, 구청 관계자와 함께 산을 올라 불을 껐다. 오씨는 “처음엔 산 밑에 소방대원들뿐이었는데 4시간 뒤 산을 내려와 보니 수백명의 시민들이 각자 자리에서 일손을 돕고 있어 깜짝 놀랐다”고 했다.
노원구청 관계자에 따르면 노원구 19개동 중 대부분에서 동장과 부녀회를 필두로 각 10명 내외의 시민이 집결했다. 이들은 직접 산에 올라 물을 뿌리거나 삽으로 잔불을 정리하는 등 현장 일손을 거들었다. 구청 관계자는 “다른 지역 시민단체 회원들, SNS 등을 보고 자발적으로 모인 시민들까지 합하면 그 수는 훨씬 많을 것”이라며 “딱히 우리가 요청한 것도 아니었는데, 긴급상황이 생기니 시민들이 힘을 보태기 위해 여기저기서 모였다”고 말했다.
소방·산림당국과 경찰, 자치단체 등으로 구성된 합동 산불조사감식반은 본격적인 화재 원인 규명에 나섰다. 야간 등산객이나 무속인 부주의 등 여러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산 주변 CCTV 등에 대한 확인작업을 벌이고 있다. 이번 산불로 인한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불탄 산림 면적은 축구장 5.5배 가량인 3만9600m²에 달한다.
신재희 기자 jshin@kmib.co.kr
호출 30분 만에 출동… 밤새워 수락산 지킨 주민 130명
입력 2017-06-02 18:07 수정 2017-06-02 2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