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아들은 놀이터에서 돌아와 바지 주머니를 털어냈다. 그 속엔 작은 돌멩이, 형들의 장난감 총알, 여자애들이 팔찌로 꿰는 구슬 따위가 서너 개씩 꼭 들어있었다. 아이는 그걸 “보물”이라며 투명한 병에 모았다. 그때 어릴 때 책에서 봤던 이야기가 아스라이 떠올랐다. 한 꼬마가 버찌씨와 구슬 따위를 들고 동네 가게에 간다.
아이는 주인 할아버지에게 금붕어를 갖고 싶다고 한다. 그리곤 할아버지의 손바닥 위에 씨와 구슬 등을 그 값으로 내놓는다. 아이는 걱정스럽게 “모자라나요”라고 묻는다. 할아버지가 가만히 내려다본다. 이어 “아니야. 거스름돈이 있는 걸”이라고 하며 아이 손에 동전 몇 개를 올려준다. 그는 아이가 소중히 여기는 것을 그렇게 지켜주었다.
이 꼬마는 곧 알게 됐을 것이다. 그 가게의 온갖 물건은 돈으로 교환된다는 것을. 하지만 자신의 천진함을 지켜준 한 어른의 공감과 배려를 오래도록 간직했을 것이다. 꼬마는 자라서 이 기억에 힘입어 다른 여러 상황에서 공감 배려 사랑이 담긴 행동을 할 수 있다. 그 기억은 사랑의 ‘생장점(growing point)’이 된다. 사랑이 가지를 계속 치는 것이다.
유아교육 분야에서 교과서처럼 읽히는 ‘딥스’(샘터). 임상심리학자 버지니아 M 액슬린이 다섯 살 남자 아이 딥스를 치료하는 과정이 나온다. 딥스는 아빠에 대한 미움이 있었다. 아빠로 정한 인형을 모래산에 묻기도 한다. 액슬린은 놀이로 딥스의 마음 문을 연다. 어느 날 딥스가 액슬린에게 자기가 좋아했던 나무 얘기를 꺼낸다.
딥스의 아빠는 나무가 위험하다며 정원사 제이크에게 그 가지를 자르게 한다. 딥스가 그 나무를 무척 좋아한다는 걸 아는 제이크 아저씨는 딥스에게 나뭇잎 하나를 가져다준다. “바람을 따라 세계여행을 갔던 이 이파리가 여행을 마친 뒤 다시 딥스의 정원으로 왔구나. 이 잎은 온 세상 어디에서도 딥스 만큼 자길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돌아온 거야.”(152쪽) 아저씨는 나무에 대한 딥스의 사랑을 아름다운 얘기로 만들어준다. 이 기억은 딥스에게 스스로 사랑을 결정할 수 있다는 심리적 은유가 된다. 딥스에게 생장점이 되는 기억이다. 여러 놀이 끝에 딥스는 결국 모래산에서 인형을 구해낸다.
주님 안에서 우리는 누구나 아이와 같이 미약한 존재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위해 선물 같은 기억을 주시기도 한다. 기독교 영성에 대한 고전 ‘하나님의 임재 연습’(브니엘) 저자 로렌스 형제(1611∼1691)의 경험이다. 그는 이파리가 모두 떨어져 앙상하기 이를 데 없는 나무 한 그루를 바라본다.
그러다 언젠가 그 가지에 다시 새싹이 돋아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바로 그때, 자신을 혼자 내버려두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와 능력을 깨닫는다. 그는 그 순간을 가장 큰 하나님의 사랑으로 기억하며 평생을 살았다. 영적 생장점이 되는 기억이다. 그런 로렌스가 같은 책에서 일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법을 소개한다.
“언제든지…심지어 죄악을 저지를 순간에도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이야기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화를 나누어야 합니다.”(88쪽) 수도원 요리사였던 로렌스는 프라이팬 위 계란을 뒤집을 때도 계란이 잘 익도록 하나님에게 기도했다고 한다. 그의 조언대로 살아가다보면 나무가 하늘을 향해 자라듯 우리도 하나님을 향해 조금씩 자라갈 것이다.
강주화 기자 rula@kmib.co.kr
[영혼의 도서관] 생장점이 되는 기억
입력 2017-06-03 0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