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술한 법망탓 미청구 수표 9000억 수익 처리… 은행만 좋은 일 시켰다

입력 2017-06-01 19:30 수정 2017-06-01 20:50
애매한 법 때문에 서민금융을 지원하는 데 쓰일 돈 수천억원이 은행 등으로 흘러들어간 것으로 나타났다. 서민금융진흥원에 출연됐어야 할 장기 미청구 자기앞수표가 금융사의 수익으로 처리되면서다.

박선숙 국민의당 의원은 1일 은행 등 금융사가 2008년부터 2016년까지 서민금융진흥원에 출연했어야 할 장기 미청구 자기앞수표 금액 9313억원을 자체 수익으로 분류했다고 밝혔다. 박 의원에 따르면 소멸시효 2년이 완성된 이 금액은 ‘서민금융 지원에 관한 법률’에서 규정하는 ‘휴면예금’이다. 이 법에 따르면 서민금융진흥원은 금융사가 출연한 휴면예금을 밑천으로 운영하게 돼 있다.

문제는 휴면예금의 정의가 이 법에 명확하게 나타나 있지 않다는 점이다. 해당 법에는 휴면예금을 “채권 또는 청구권의 소멸시효가 완성된 예금”이라고 정의했다. 2012년 대법원이 “정기적으로 이자가 지급되는 예금은 소멸시효가 완성됐다고 볼 수 없다”고 판결하자 이후 은행들은 서민금융진흥원 출연금을 사실상 없애다시피 했다. 판결에 따라 이자가 지급되는 은행·저축은행의 예금이 휴면예금에서 제외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정의에 따르면 미청구된 자기앞수표는 정기적 이자가 없기 때문에 휴면예금에 포함된다. 2008년부터 은행권에서 잡수익으로 처리된 미청구 자기앞수표 금액 규모는 시중은행과 지방은행까지 합해 7936억원이다. 하지만 법이 만들어진 즈음인 2008년 은행권과 서민금융진흥원이 맺은 관련 협약에는 출연금 범위를 ‘요구불예금 및 저축성예금’이라고 정했다. 금융사와 기관이 맺은 협약과 법이 어긋난 셈이다.

이순호 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법과 대법원 판례를 볼 때) 장기 미청구 자기앞수표는 이자가 지급되지 않기 때문에 휴면예금으로 해석될 소지가 충분하다”면서 “다만 법의 근본 취지가 관리비용을 덜기 위해 돈을 원 권리자에게 돌려주는 게 목적이기 때문에 어떻게 봐야 할지는 시각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박 의원은 장기 미청구 자기앞수표 금액이 좀 더 명확하게 서민금융진흥원 출연 대상이 되도록 법 개정안을 발의하겠다고 밝혔다.

조효석 기자 promen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