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음… 비명… 다급한 손놀림… 안도… ‘폭풍드라마’ 끝나면 허탈·보람 교차

입력 2017-06-04 17:30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흔적, 환자의 신음과 보호자의 눈물, 의료진의 다급한 손길이 뒤섞여 피와 땀으로 채워진 드라마가 매일 새롭게 쓰여진다.
울음소리가 요란했다. 주사가 무서운 아이는 바늘이 닿지도 않았건만 울기 시작했다. 자주색 수술복의 간호사는 어르고 달래며 주사를 놓았다. 정맥혈관은 요리조리 간호사를 따돌리지만 무릎을 꿇고 열중한 전문가의 손끝을 피하지 못했다. 그걸 보는 아빠는 발을 동동 구르고 할아버지는 연신 "우리 아가"라고 중얼거렸다. 밀려드는 응급환자로 동분서주하는 의료진의 땀 냄새가 풀풀 풍긴다. 서울시 도봉구에 위치한 한일병원 응급의료센터의 '불금' 풍경이다.

지난달 26일 오후 6시부터 이튿날 오전 6시까지 의료진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봤다. 그날 금요일 밤을 버텨낼 의료진은 당직의를 포함해 전공의 2명, 인턴과 PA, 십여 명의 간호사, 응급구조사 2명 등이었다. 지린내와 땀, 피비린내가 소독약이 뒤섞인 냄새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응급실을 채운 고통의 사연은 저마다 다르지만 이들을 돌보는 의료진의 매일은 흡사 액션 영화를 방불케 했다. 이들의 고군분투는 밤이 되면 사투로 뒤바뀐다. 드라마 '골든타임'과 같은 극적인 순간은 없었지만, 체력의 극한을 시험하는 고강도의 '액션 치료'는 많았다. 달달한 로맨스로 버무린 드라마 속 응급실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현실 속 그것은 하드코어 활극에 가까웠다.

34만명 거주 도봉구내 유일한 종합병원

한일병원은 13만6898 세대의 34만8220명이 거주하는 도봉구내 유일한 종합병원이다. 인구 32만7195명, 14만1229세대의 강북구까지 사실상 ‘커버’ 한다. 인구가 많다보니 급작스런 환자의 행렬도 끝이 없다. 지난해 5만3000명이 넘는 환자가 응급실을 방문했고, 5월 한 달 동안 5000명이 다녀갔다고 한다. 응급센터는 크게 중앙구역(CPR)과 중증환자구역(환자관찰구역), 소아구역으로 구분된다. 소처치실과 두 개의 처치실, 중증도분류실, 간호사실, 초음파실, 세척실, 당직실 등이 동선을 고려해 배치돼 있다. 병상은 중앙구역을 중심으로 환자의 상태에 따라 멀어지도록 꾸며져 있었다.

“으악! 아파요. 너무 따가워요.” 화상환자의 비명 소리는 처절했다. 귀를 막고 싶을 정도로 충격적이기도 했다. 처치실에서 소독과 드레싱을 받는 환자의 비명은 끝날 줄 몰랐다. 응급실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였다. “라면 국물에 데였고 손상 부위는….” 환자의 상태는 수시로 보고 되는 듯 했다. 환자 돌보랴, 보고하랴 정영윤 전공의(34)는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다. 응급실 곳곳에서 들려오는 신음소리에도 그는 침착해 지려고 애쓴다. 환자의 상태를 안정시키고 고통의 경감이 제때, 적절히 이뤄지려면 당황은 금물이다. 짧지 않은 응급실 생활 동안 ‘평정심 근육’이 제법 늘어난 모양이었다. 간호사도 바쁘긴 마찬가지이지만 환자에게 만큼은 퍽 다정하게 대하는 듯 했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환자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의 힘은 크다. 당장의 고통을 일소시키진 못해도 심리적 안정에 적잖은 도움이 된다. 그러나 취객들은 이마저도 공연한 트집의 빌미로 삼곤 한다.

응급실은 빠르게 환자로 채워졌다. “아이고 옆구리야.” “할머니 혈압 재는 거 금방 끝나요. 상처는 없는지 잠깐 볼게요.” “여기가 아파요? 통증 심하시면 아픈 거 나아지는 주사 놔드려요?” “아이고 나 죽네.” “야 이 개XX들아! 아파죽겠다고. 어떻게 좀 해봐!” “환자분 정확히 어떻게 아픈지 설명을 해 주세요.” “아파! 아프다고 씨X!”

성난 언어 둥둥… 가장 큰 골칫거리는 주취 폭력

성난 언어가 떠다닌다. 이 정도면 참을만하다. 가장 큰 골칫거리는 주취 폭력이다. 수일 전에도 의료진이 술 취한 사람에게 봉변을 당했다. 취객의 막말과 욕설, 폭력은 의료진을 지치게 한다. “취객 환자가 제일 힘들어요. 피범벅이 된 상태로 실려 오는데 진정시키려면 한참 걸리거든요.” 이 말을 하는 하철민 당직의(38)도 적잖이 ‘당한’ 눈치였다. “환자가 의료진에게 욕하면 소릴 지르면 저희도 사람이라 힘들어요.” 손다혜 간호사(33)도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응급실 경력 12년차의 베테랑 간호사이지만 눈앞에서 날아다니는 주먹질과 거친 욕설에는 도통 적응이 되지 않는다.

의료진의 고충은 이외에도 많다. 무엇보다 일이 바쁘다. 하철민 당직의는 “한창 바쁠 때는 힘들다는 생각조차 못한다”고 했다. 과거에 비해 상황이 나아졌다고는 해도 응급실의 업무 강도는 병원 내에서도 센 축에 든다. 밤샘 근무 후의 불면증은 응급센터 의료진만의 훈장인 셈.

환자들의 고통 섞인 신음도 여간 괴로운 게 아니다. 통증의 잔향은 강렬하다. 귀에 남는 자극적인 흔적은 또 다른 스트레스다. 그럴 때면 손 간호사는 운동으로, 안주하 간호사(28)는 ‘혼술’로 푼다. 이쯤 되면 응급센터가 지긋지긋할 법도 한데 나름의 매력이 있단다. “여기선 환자의 상태가 눈에 띄게 좋아지는 모습을 볼 수 있거든요. 응급센터만의 장점이에요.” 손 간호사가 싱긋 웃었다.

가슴 뛰는 구급차 행렬 … 더해지는 긴장

밤이 깊어지자 구급차의 행렬은 더 잦아졌다. 응급센터에 일순 긴장감이 흘렀다. 한 병상에 의료진이 속속 모여들었다. 환자의 심장이 너무 빨리 뛰고 있었다. 박동을 늦추는 약이 신속하게 투여됐다. 의료진은 심전도를 재차 확인하며 상태를 살폈다. 환자는 점차 정상을 찾아갔지만 외줄 위에 선 듯 매순간이 긴장의 연속이었다. 소처치실은 이미 아비규환. 어린 환자들의 울음소리가 도돌이표처럼 반복됐다. 안주하 간호사는 아이들을 다루는데 익숙하다. “하나도 안 아프지? 잘 참고 대단하네.” 칭찬에 아이가 눈물을 뚝 그쳤다. 그렇지만 다음 차례의 아이는 잔뜩 겁을 집어먹었다. 까맣고 작은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환자의 수와 의료진의 피로도는 정비례한다. 특히 잠이 부족한 전공의들은 쪽잠으로 버틴다. 잠시 짬이 난 전공의 한 명이 책상에 고개를 박고 졸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잠들어 버렸다. 달콤한 휴식은, 그러나 10여분 만에 끝났다. 그에게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있었다. 어깨에 눌어붙은 피곤함은 그가 의사를 계속하는 한 짊어져야 할 동반자일 터. 환자는 늘 그의 손을 기다릴 것이다. 응급의학을 전공한 의사의 숙명일지도 모른다.

독특한 사연의 환자들도 응급센터에 온다. 자정이 가까울 무렵 젊은 부부가 사내아이 둘을 데리고 응급실을 찾았다. “왼쪽 코에 비비탄(장난감 플라스틱 총알)이 들어갔어요. 이 사고뭉치들, 가만히 앉아있어.” 의사는 앞니가 빠진 개구쟁이를 소처치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울음소리가 한번 들리는가 싶더니 ‘총알 제거’는 무사히 끝났다. 연신 웃음을 터뜨리는 아빠는 급기야 ‘인증샷’을 찍을 기세다. 아내는 철없는 남편이 얄밉다.

일년 내내 반복되는 익숙한 풍경들

자정이 지나 정영윤 전공의도 근무를 마치고 돌아갔다. 응급실도 잠시나마 소강상태다. 한편에선 할머니와 의료진간의 실랑이가 한참이었다. 할머니 환자의 입에서는 연신 걸쭉한 육두문자가 툭툭 튀어나왔다. “이놈들이 날 잡아먹으려고 하는구나. 나 죽는다. 아이고 나 죽어.” 엑스레이 촬영의 이유를 거듭 설명하는 의료진의 목소리에 답답함이 묻어난다. “할머니 힘드셔도 기본 검사라 찍어야 해요.” 이번엔 보호자가 앞을 가로막았다. “거, 만날 엑스레이며 CT를 찍어도 낫지도 않습디다. 허구헌 날 검사만 하면 어쩌라는 거냐고. 찍기만 하면 다야? 찍으려면 돈 안 드는 걸로 해.”

“저는 이제 차트만 정리하고 갈 거예요.” 간호사 한 명이 기자에게 말했다. 그의 말이 끝내기가 무섭게 보호자가 다급히 간호사를 찾았다. “딸내미가 속이 안 좋다고 하는데 잠깐 봐주세요.” 간호사는 한걸음에 달려갔다. 퇴근하는 간호사가 부러웠다. 부러움을 느끼리라곤 전혀 예상치 못했다. 고작 하룻밤 응급실에 기거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피곤이 몰려왔다. 깊은 새벽 몇 명이 빠져나간 자리는 또 다른 의료진으로 채워졌다.

아침이 올 때까지 수많은 환자들이 응급센터의 문을 두드렸다. 다시 밤이 되면 이보다 몇 곱절 많은 환자가 다시 찾아올 것이다. 하룻밤 기자가 머물렀던 응급센터의 풍경은 일 년 내내 반복된다. 매일의 풍경은 개별적이면서 보편적이다. 고통의 사연은 개인적이다. 환자를 감싼 붕대와 거기 묻은 피처럼 진한 삶의 흔적은 응급센터에 남는다.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흔적. 환자의 신음과 보호자의 눈물, 의료진의 다급한 손길이 뒤섞여 피와 땀으로 채워진 드라마는 매일 새롭게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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