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말해, 며칠 전 타계한 영국 배우 로저 무어 경을 ‘명우’라고 하긴 어렵다. 매력적이고 멋진 배우이긴 했어도. 그가 받은 기사 작위도 로렌스 올리비에나 알렉 기네스, 심지어 마이클 케인 등과는 종류가 달랐다. 즉 이들은 모두 영화 등 예술에 기여한 공로(다시 말해 연기력)를 인정받아 작위를 받은 데 반해 무어의 작위는 유니세프 친선대사 등 정력적으로 ‘자선활동’을 벌인 공로로 받은 것이다. 그러나 영화 역사상 불멸의 캐릭터 007 제임스 본드역을 맡아 가장 많은 7편의 본드 영화를 남긴 그의 이름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살아 있을 게 분명하다. 그만큼 3대(엄밀하게는 4대다) 본드로서 로저 무어는 세계 영화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사실 무어는 1954년 데뷔부터 거의 사망할 때까지 60여년간 배우 활동을 했지만 본드 영화를 제외하면 딱히 이거다 라고 할 만한 대표작이 없다. 본드 역할로 세계적 톱스타가 된 뒤 리 마빈과 공연한 ‘샤우트(피터 헌트, 1976)’, 리처드 버튼, 리처드 해리스와 공연한 ‘지옥의 특전대(앤드루 V 맥클라글렌, 1978)’ 등 이런 저런 흥행작들에 얼굴을 비쳤지만 내세울 만한 작품이나 역할은 찾아볼 수 없다. 초대 본드 숀 코너리가 007을 그만둔 후에도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받는 등 연기력을 뽐내며 맹활약한 데 비교할 수조차 없다.
오죽하면 어떤 평론가는 무어가 세 가지 표정밖에 짓지 못한다고 혹평했다. 한쪽 눈썹 치켜올리기, 다른 쪽 눈썹 치켜올리기, 그리고 두 눈썹 모두 치켜올리기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무어는 이 혹평을 갖고도 자기비하성 농담으로 써먹곤 했다. 그의 인간미를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무어의 인간적 에피소드 하나 더. 그에게는 머무는 호텔마다 수건을 집어오는 괴상한 수집벽이 있었다는데 한 영국 신문에 ‘로저 무어는 수건 도둑’이라는 기사가 실리는 바람에 그만뒀다고. 그러나 그의 스위스 자택에는 수집해 놓은 호텔 수건 컬렉션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고. 참으로 인간적이었던 로저 무어 경이여, 편히 잠드시길.
김상온(프리랜서 영화라이터)
[영화이야기] <124> 로저 무어 경을 추모하며
입력 2017-05-30 17: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