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싣는 순서> ① 퇴사가 꿈이 된 신입사원들 ② 사표 부르는 조직문화 백태 ③ 사표 던진 이후의 삶 ④ 부장들의 항변 ⑤ 사실 나도 ‘꼰대’다
[취재대행소 왱] 할 일이 남은 것도 아닌데 퇴근하지 못했다. 점심 메뉴는 상사와 같은 걸 시켜야 했다. 미세먼지 흩날리는 주말에 왜 등산을 가자는지 모르겠다. 마음대로 쓰지도 못하는 휴가인데 그마저 하루 전에야 휴가 가라는 통보를 해준다….
신입사원들이 취재팀에 털어놓은 속마음에는 열거하기 벅찰 만큼 다양한 고민이 담겨 있었다. 지난해 대졸 신입사원 중 27.7%가 1년도 안 돼 회사를 그만뒀다. 2014년 23.6%에서 훌쩍 불어난 이 수치는 사상 최악의 취업난을 감안하면 납득하기 어렵다. 무엇이 이들을 떠나게 만든 것일까.
먼 나라 이야기 ‘워라밸’
지난해 어느 봄날, 김승혜(이하 가명·28·여)씨의 상상은 드디어 현실이 됐다. 입사한 지 1년9개월. 그는 힘들게 취업한 대기업을 박차고 나왔다. 김씨 업무는 일정하고 규칙적이라 야근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가 낮 시간에 한눈팔지 않고 열심히 일한 것도 그래서였다.
그런데 오후 6시가 지나도 집에 가는 사람이 없었다. 소속 부서의 상무부터 순차적으로 퇴근하는 ‘관례’ 때문이었다. 야근수당도 없었다. 퇴근의 위계를 깨고 먼저 일어서면 다음 날 꾸중을 들었다. 일을 다 끝낸 김씨는 퇴근 순서가 올 때까지 넋 놓고 있거나 인터넷 서핑을 해야 했다. 그는 “열심히 하는 게 손해라는 생각이 들면서 일과 시간에 최선을 다하지 않게 됐다”고 말했다.
‘저녁이 있는 삶’은커녕 ‘워라밸’(워크 앤 라이프 밸런스·일과 삶의 균형)이란 말 자체가 사치인 직장이 수두룩하다. 업종이나 직무가 달라도 상황은 비슷하다. 올해 초 중견기업에서 퇴사한 송효민(25·여)씨는 지난해 5월 출근 첫날 “상사가 다 있는데 먼저 퇴근하는 눈치 없는 짓은 하지 말라”는 공지를 받았다. 업무일지는 하루가 멀다 하고 조작됐다. 송씨는 “실제 근로시간은 10∼12시간인데도 법정 근로시간인 8시간에 맞춰 거짓으로 업무일지를 작성했다”고 말했다.
중견기업 2년차인 서정후(28)씨는 황금 같은 5월 주말을 대부분 회사 사람들과 보냈다. 지난 13일에는 연휴 동안 일이 밀렸다는 팀장의 말에 팀 전체가 출근해 근무했다. 막상 일거리는 많지 않았다. 그다음 주말에는 ‘북한산 등산 번개’가 있었다. 금요일 오후 10시까지 야근하고 토요일 아침에 불려 나갔는데 산행 후 뒤풀이까지 마치고 귀가하니 오후 9시였다. 서씨는 “말이 번개지 반쯤 강제였다”면서 “선약이 있는지는 아랑곳하지 않는 분위기”라고 했다.
회사 규모가 작을수록 사정이 나빴다. 오승우(27)씨가 다니던 중견기업은 야근수당은 물론 주말근무에 따른 대체휴일도 없었다. 벤처기업에서 영업홍보를 하던 박형식(29)씨의 점심시간은 길어야 15분이었다. 오전 7∼8시까지 밤새 일한 뒤 서너 시간 쉬고 출근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박씨는 “계약서에 적혀 있던 ‘탄력적 근무’가 모든 것을 옭아맸다”고 했다. 경총에 따르면 지난해 300인 미만 기업의 신입사원 중 32.5%가 1년 안에 퇴사했다.
군대 같은 직장, 막돼먹은 상사님
근무 시간도 괴롭긴 마찬가지였다. 스트레스는 대부분 ‘사람’에게서 왔다. 김승혜씨 회사는 회식에 불참하면 승진에 불이익을 받는 구조였다. 상사와의 친밀도가 고과에 반영된다. 김씨는 친해지고 싶은 상사가 별로 없었다고 했다. 후배들 머리를 파일로 때리거나 발길질하는 이들이 꽤 있었다. 회식자리에서 자신의 성 경험을 구체적으로 얘기하고 여직원들이 불쾌한 내색을 드러내면 재밌어하는 경우도 봤다. 김씨는 “그래도 식사 때 무조건 상급자 메뉴를 따라 시켜야 하는 옆 부서보다는 나았다”고 말했다.
오는 7월 퇴사 예정인 중소기업 영업직원 홍주혁(29)씨는 자주 만취 상태로 출근하는 대표에게 업무 보고를 하는 게 고역이라고 했다. 대표가 술이 깬 뒤 다시 보고해야 하는 상황이 반복되곤 한다. 참다못해 업무시간에 음주는 자제해 달라고 건의했다가 “어린놈이 어디서 감히”로 시작되는 꾸중을 들었다. 홍씨는 “육두문자 듣는 건 일상이었고 드라마 장면인 줄만 알았던 서류 뿌리기도 당해봤다”고 했다.
이런 환경에서 능력을 제대로 평가받기는 결코 쉽지 않다. 퇴사를 고민 중인 대기업 2년차 사원 이지연(26·여)씨는 “우리 팀장은 일을 못해도 아부에 소질 있는 후배를 더 챙긴다”고 했다. 싫어하는 후배에게는 ‘징벌성 업무’를 던지기 일쑤고, 본인은 주말에 할 일이 없어도 회사에 나와 TV를 보다가 수당을 받아간다는 것이다. 이씨는 “팀장의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회의가 생기고 나도 저렇게 될까 봐 무섭다”고 털어놨다.
직무, 먹는 건가요?
계약과 다른 업무에 내몰리는 것이 힘들었던 신입사원도 많았다. 부푼 마음을 안고 입사한 그들의 미래에 회사는 관심이 없었다. 영업홍보 업무로 입사한 박형식씨는 마케팅은 물론 인사, 매장관리, 부스 설치 엔지니어 일까지 업무의 전 과정을 떠맡아야 했다. 일을 배울 사람도 없었다. 홍보 제안서는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홍주혁씨도 비슷했다. 영업 전체를 혼자 하는 것도 부담스러운데 콘텐츠 기획, 샘플 테스트, 피드백 등 다른 부서 일도 추가로 떨어졌다. 홍씨는 “서로 계통도 다른 업무가 너무 많은 통에 정신이 없는데 실수라도 저지르면 육두문자가 날아왔다”면서 “내 일도 아닌 일을 떠맡고 있는 것에 대한 상사들의 지도나 이해는 전혀 없었다”고 말했다.
2015년 8월 대기업에 입사한 정주희(27·여)씨는 직무 문제로 지난해 5월 퇴사했다. 전국에 점포를 둔 외식업 특성상 매장업무부터 시작할 필요가 있다는 건 정씨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현장 인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본사 발령이 자꾸만 늦어졌다. 먼저 본사로 돌아간 동기들도 입사한 직무 그대로 배치된 경우가 드물었다. 힘든 일은 무조건 막내 몫이라는 분위기는 매장이나 본사나 같았다.
정씨는 “구직자들이 욕심낼 만한 직무로 일단 채용했다가 아무 자리나 꽂아 넣는 식”이라며 “직원의 경력 관리는 안중에 없이 돌려막기에 쓸 소모품으로만 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신입사원들은 이 모든 것을 견딜 만큼의 급여는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 미래까지 참담하게 느껴진다고 입을 모았다. 그들이 ‘버티기’를 포기하게 되는 이유다. 정씨는 “바뀔 여지가 있는 회사라면 더 버텼겠지만 기대가 전혀 없다”고 말했다. 오씨는 “내가 여기 계속 있으면 팀장처럼 될 것 같아 더 다니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다”며 “팀장은 신혼인데 주말에도 늘 출근하고 부장에게 시달린다. 참 안돼 보였다”고 했다. 김씨는 “인생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 회사인데 그 시간을 이렇게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슬펐다”고 말했다.
글=전수민 기자 suminism@kmib.co.kr, 삽화=전진이 기자
[대한민국 신입사원 리포트] 할 일 없어도 퇴근 못하고 주말엔 반강제 등산 “너무해”
입력 2017-05-30 05: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