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이흥우] 시험대 선 문재인 인사원칙

입력 2017-05-29 17:26

이낙연 총리 후보자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고 있을지 모른다. 전남도지사 직무에 충실했더라면 적어도 인생이 깡그리 짓밟히는 참담함은 느끼지 않았을 테니까. 더불어민주당의 지지도가 압도적인 현재의 호남 여론 추이라면 내년 도지사 재선은 떼어 놓은 당상이다. 그런 그가 문재인정부 초대 총리직을 수락한 것은 보다 큰 정치를 하고 싶어서였을 거다.

이 후보자 인준을 둘러싼 여야 기싸움이 치열하다. 익히 봐왔던 익숙한 풍경이다. 공격과 방어의 주체만 바뀌었을 뿐 행태는 이명박·박근혜정부 때의 판박이다. 이 후보자는 자신도 몰랐다는 28년 전 부인의 위장전입 문제로 야당의 파상공세에 시달리고 있다. “처참하다”고 머리를 숙인 이 후보자가 안쓰럽기도 하다.

이번 인준과정은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특이한 점이 있다. 주공격 대상이 공직 후보자가 아니라 대통령이라는 사실이다. 기억을 조금만 더듬어 보더라도 박근혜정부에서 낙마한 김용준, 안대희, 문창극 총리 후보자의 경우 후보자의 능력과 자질, 도덕성에 초점이 맞춰졌지 대통령이 논란의 중심에 서지는 않았다.

위장전입은 불법이다. 3년 이하의 징역이나 1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지는 중죄다. 하지만 지금도 별다른 죄의식 없이 저지르고 있는 게 현실이다. 부동산 투기용에서 자녀 교육용으로 목적이 변했을 뿐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자식을 좋은 학교에 보내려는 맹모(孟母)들을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다. 현역 국회의원 중 위장전입 전력이 없는 의원이 몇 명이나 될지 매우 궁금하다.

문 대통령이 후보 시절 현실에 대한 깊은 생각 없이 위장전입자를 공직 인선에서 배제하는 5대 인사원칙을 발표하면서 오늘의 사태를 잉태했다. 강경화 외교장관 후보자,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 후보자도 자유롭지 못하다. 문 대통령의 지지율 고공행진에 존재감을 상실한 야당은 반전의 호기를 잡았다. 대통령을 대신해 비서실장이 사과하고 양해를 구했음에도 야당은 대통령이 직접 나서라고 한다.

국무총리는 국회 동의를 얻어 임명된다. 이 후보자 부인의 위장전입이 총리 직무 수행에 결정적 결격 사유라면 표결로 부결시키면 그만이다. 현재의 여소야대 의석 분포상 어렵지 않다. 그럼에도 야당이 섣불리 그러지 못하는 건 이 후보자의 흠결이 낙제점은 아니라는 것에 다름 아니다. 낙제점이라면 진작 이 후보자 사퇴를 요구하고 나섰을 게 틀림없다.

대통령 길들이기에 야당의 목적이 있다. 총리 인준 문제를 야당의 존재감을 확실하게 각인시키는 기회로 삼고 있다. 위기의 야당으로선 불가피한 선택이다. 야당은 대통령에게 공을 넘겼다. 선택은 문 대통령의 몫이다. 때론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가 현명한 수단이 된다.

5대 인사원칙은 깨졌다. 고집할 수도 없는 형편이다. 야당이 빼든 칼을 그냥 칼집에 넣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정치적 협상은 으레 ‘야당의 명분, 여당의 실리’로 귀결된다. 정치에선 지는 게 이기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야당에 명분을 주는 데 인색할 필요가 없다. 더욱이 문재인정부에 꼭 필요한 인재를 얻는 일이라면 열 번이고 백 번이라도 그래야 한다.

문 대통령은 노무현 대통령 8주기 추도사에서 “이상은 높았고 힘은 부족했다. 현실의 벽을 넘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이상을 실현하는 힘이 뒷받침되지 않아 실패했던 노무현정부에 대한 반성이다. 문재인정부 역시 힘이 부족하다. 현실의 벽에 부닥칠 경우가 많다는 의미다. 이낙연 총리 인준이라는 벽을 넘으려면 이상을 낮추고 현실과 타협하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다. 문재인정부로선 21대 총선이 3년이나 남았다는 게 비극이라면 비극이다.

이흥우 논설위원 겸 정치부 선임기자 hw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