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신입사원 리포트] ‘눈치·버티기·무시’ 조직문화… 겪어보니 앞이 캄캄
입력 2017-05-29 05:01 수정 2017-05-29 19:08
<글 싣는 순서> ① 퇴사가 꿈이 된 신입사원들 ② 해도 너무한 조직문화 백태 ③ 사표 던진 이후의 삶 ④ 부장들의 항변 ⑤ 사실 나도 ‘꼰대’다
[취재대행소 왱] 직장생활이 쉽지 않다는 얘기는 누구나 귀에 못이 박히게 듣는다. ‘신입사원’은 그 쉽지 않은 생활을 목표로 오랜 기간 준비한 사람, 치열한 경쟁을 뚫고 마침내 목표를 이룬 사람을 뜻한다. 그런데 사원증 잉크도 마르기 전에 그들에게 새로운 목표가 생기고 있다. 신입사원 10명 중 6명 이상이 ‘퇴사’를 희망한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그중 37%는 조직문화 때문에, 30.6%는 직장 상사 때문에 회사를 그만두고 싶다고 답했다.
사표 부추기는 ‘눈치문화’
국민일보가 모바일리서치업체 오픈서베이를 통해 ‘회사에 대한 신입사원들의 생각’을 조사한 결과 입사 1∼2년차 25∼34세 신입사원 858명 중 62.8%(539명)가 ‘사표를 내고 싶다’고 답했다. 퇴사를 원하는 500명에게 견디기 힘든 점을 물었더니 ‘정시퇴근 및 휴가가 자유롭지 못한 눈치 문화’(68.4%·복수응답)를 꼽은 응답자가 가장 많았다. 지난해 한국경영자총협회가 실시한 조사에서도 신입사원들은 ‘조직 및 직무 적응’(49.1%)을 가장 큰 고충으로 꼽았었다. 상사 눈치 때문에 할 일이 없어도 사무실에 남아 있거나 휴가 얘기를 꺼내기 부담스러운 분위기를 힘들어하고 있는 것이다.
이어 밥 먹듯이 야근하는 ‘버티기 문화’(47.0%), 인격모독에 가까운 ‘무시 문화’(39.4%)를 지적한 답변이 많았다. 특히 ‘인격 무시’는 상대적으로 여성 응답자가 많이 꼽았다. 기업 조직에 여성 신입사원을 무시하는 분위기가 여전히 남아 있음을 보여준다. 자기계발을 하지 않는 ‘무기력 문화’(37.2%), 위계질서가 엄격한 ‘군대 문화’(34.8%), 배경에 따른 ‘차별 문화’(20.6%), 회식을 시작하면 끝을 보는 문화(20.2%) 등이 뒤를 이었다. 일부 응답자는 “일을 떠넘기는 빈대 문화”나 “퇴근 후 또는 주말의 카카오톡 업무지시 문화”를 지적했다. 이번 여론조사는 95% 신뢰수준에 표본오차는 ±4.38% 포인트다.
지난해 상반기 유통 대기업에서 퇴사한 김승혜(이하 가명·28·여)씨는 이번 설문조사에 등장한 조직문화를 “하나도 빠짐없이 고스란히 경험했다”고 말했다. 그 기업에 대한 악평을 익히 듣고 입사했지만 아는 것과 겪는 것은 달랐다고 한다. 김씨는 “취업난이 심하니까 처음에는 어디든 뽑아주는 곳에 나를 맞추겠다고 다짐했는데, 생각보다 버티는 게 쉽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부장님, 소통해주세요”
눈치 문화, 버티기 문화, 군대 문화 등 바뀌어야 할 기업문화의 대부분은 ‘상사’와 닿아 있다. 실제로 회사를 그만두고 싶은 이유로 ‘상사와의 갈등’을 꼽은 응답자가 30.6%(153명)나 됐다. 상사가 아닌 다른 직원과의 갈등(19.8%)보다 10% 포인트 이상 높은 수치다.
신입사원들이 상사에게 바라는 건 무엇일까. 조직원들과의 소통을 꼽은 응답자가 51.8%로 가장 많았다. 인격 존중(49.0%), 명확한 비전 제시(46.6%), 자기계발 기회 허용(45.2%) 순이었다. 29.6%는 상사가 자신에게 무관심했으면 좋겠다고 답했다. 8.2%는 설문지의 ‘기타’ 항목에 ‘자기 할 일을 똑바로 하고 남을 가르쳤으면 좋겠다’ ‘본인 잘못을 부하 직원에게 넘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책임을 미루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썼다.
퇴사를 생각하게 된 직접적 이유로는 60.4%가 ‘급여 불만’을 꼽았다. 조직문화에 치이고 상사에게 시달리며 버티던 이들에게 ‘퇴사 방아쇠’가 되는 건 역시 돈 문제였다. 복지에 대한 불만(44.8%), 과도한 업무량(44.6%), 회사 미래에 대한 불안감(44.6%)이 비슷한 응답률로 뒤를 이었다. 불합리한 조직문화(37.0%)도 퇴사 사유로 꼽혔다. 적성에 맞지 않는 업무(30.2%), 잦은 야근과 회식(22.4%) 때문에 그만두고 싶다는 응답도 있었다.
얼마 전 퇴사를 감행한 정주희(27·여)씨는 “사원들이 느끼는 문제의식만큼의 값어치가 되는 급여나 복지 등 처우를 회사가 제공했다면 아마 조금 더 버틸 수 있었을 것”이라며 “결국에는 내 노동력이 평가절하되고 있다는 느낌이 퇴사 결심을 부추긴다”고 말했다.
회사는 전쟁터, 나가면 지옥?
마음이 굴뚝같아도 퇴사가 결코 쉽지만은 않다. 아이러니하게도 퇴사를 가로막는 가장 큰 이유는 퇴사하고 싶은 이유와 맞닿아 있었다. 가장 많은 응답자(69.0%)가 당장 월급이 필요해 퇴사를 못하고 있다고 답했다. 다른 직업을 구하기 어려울까봐(64.0%), 다른 회사도 마찬가지일 것 같아서(51.4%) 그만두지 못한다는 비율도 절반을 넘었다. 24.8%는 부모 등 지인의 눈치 때문에 퇴사를 못한다고 했다. “내가 나약해 이런 생각을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어 퇴사가 망설여진다”고 적은 응답자도 있었다.
그럼에도 홍주혁(29)씨는 오는 8월 지금 다니는 중소기업을 그만둘 예정이다. 교육출판업계에서 1년4개월간 영업하며 쌓은 경력을 버리고 다른 업계로 옮겨갈 거라고 했다. 갓 태어난 아이를 둔 새내기 아빠가 퇴사를 결심하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홍씨는 “지금 연봉도 한 푼 남는 것 없이 생활비에 딱 맞는데 경력을 버리고 이직하면 연봉이 400만원쯤 줄어들 것 같다”며 “저녁시간과 주말에 대리운전 같은 아르바이트라도 하면서 채울 각오가 돼 있다”고 말했다.
글=전수민 기자 suminisn@kmib.co.kr, 일러스트=공희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