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김찬희] 주부의 탄생

입력 2017-05-28 17:30

눈 깜짝할 새 벌어졌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가락을 보는 순간 심상찮음을 직감했다. 병원 세 군데를 거쳐 수지접합 전문병원 응급실로 들어섰다. 동맥과 신경, 인대를 잇는 미세현미경수술을 해야 한다며 대기하라고 했다. 시계는 오후 9시. 더 미룰 수 없어 아내를 응급실에 두고 택시를 잡아탔다. 집에 오자마자 부리나케 두 아이의 저녁상을 차렸다. 식은 밥과 프라이팬에 구운 햄이 전부. “대충 먹고 알아서 자렴. 아빠는 병원에 간다.”

오후 11시50분쯤 수술을 마친 의사는 보호자를 찾았다. “수술은 잘됐습니다. 2주 동안 입원하면 됩니다.” “2주라고요?” 눈앞이 캄캄해졌다. “저희가 사정이 여의치 않는데요. 아이를 봐줄 사람도 없고, 저도 아내도 일을 해야 합니다.” “동맥을 이었는데, 혈관이 막히지 않도록 항응고제와 혈관확장제를 투약해야 합니다. 피가 안 돌면 조직이 괴사합니다. 방법을 찾아보세요.”

깊은 한숨과 함께 ‘2주짜리 주부’가 탄생했다. 1주일 휴가와 고향에서 상경할 어머니의 ‘구원 등판’으로 어떻게든 막아지겠지 했다. 그런데 빈자리는 컸다. 첫 난관은 밥이었다. “아빠, 밥이 아니라 떡인데요.” “새벽부터 일어나서 지은 건데, 그냥 먹으면 안 되겠니.” 밥은 그래도 낫다. 반찬은 난공불락이었다. 궁리 끝에 즉석 국과 냉동조리식품 등을 무더기로 샀다.

학교 준비물과 숙제 챙기기, ‘학원가방 셔틀’은 숫제 블랙홀이었다. 끝없는 인내와 시간, 땀을 요구했다. 아내 설명에 따라 빈 공책에 두 아이의 요일별 동선을 적었다. 학교 보내고 병원 들렀다가 아이들 학교 마치는 시간에 맞춰 ‘가방 셔틀’을 했다. 그 와중에 저녁과 다음날 아침 찬거리도 준비해야 했다. 따가운 햇볕 아래에서 냉커피를 홀짝이다 문득 ‘이러니, 다들 애를 안 낳으려고 하지’ ‘아이 낳고(저출산 해소에 공헌), 일까지 하는(노동력 충당에 공헌) 엄마에겐 국가에서 표창장을 줘야 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를 낳지 않는 이유를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출산율은 여성의 경제활동참여율, 출산·보육의 경제적 부담에 반비례한다고 볼 수 있다. 집값과 자녀 교육비도 영향을 준다.

우리는 꽤 오랫동안 저출산 폭풍을 맞고 있다. 지난해 합계출산율(여성 1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예상하는 자녀 수)은 1.17명이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224개국을 조사한 출산율 통계에서 220위다. 우리 밑은 홍콩 대만 마카오 싱가포르뿐이다.

정부는 미래 노동력 확보를 위해 출산율을 높이는 동시에 현재 생산가능인구를 충당하려고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 높이기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하지만 10년간 100조원을 넘게 쓰고도 결과는 신통찮다. 출산과 보육을 가정, 특히 여성이 전담하는 구조가 깨지지 않아서다.

이미 혹독한 저출산을 경험한 나라들은 어떨까.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활발한 스웨덴은 1930년대에 저출산 문제를 심각하게 겪었다. 그들은 일찌감치 아동수당, 급식제도, 출산휴가제, 공공탁아소, 보육보장제를 도입하고 방과후 프로그램 운영, 남성 육아휴직 의무화를 하면서 위기를 극복했다. 스웨덴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전문직 여성의 출산율이 상위권이다.

저출산에서 탈출한 나라들의 공통점은 국가가 육아와 보육, 교육을 책임진다는 데 있다. 반면 우리는 친지나 유료 돌봄서비스 등을 이용하지 않으면 아이 하나 키우기도 어렵다. ‘인구절벽’이라는 가보지 않은 길 앞에 서있는 지금, 생각을 바꿔야 한다. 이제 아이는 국가가 키워야 한다.

김찬희 경제부 차장 ch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