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도박 검증사이트?… 되레 ‘홍보’ 창구

입력 2017-05-26 05:01

서울 강남의 한 주점에서 일하는 A씨(26·여)는 이달 초 어렵게 번 300만원을 날렸다. 주점 손님이었던 김모(24)씨의 말에 혹해 불법도박 사이트에 돈을 넣은 게 화근이었다. 김씨는 “해외 소재 도박 사이트에 300만원을 입금하면 두 시간 내에 1000만원으로 불려준다”고 A씨를 꼬드겼다. 김씨의 말과 달리 도박 사이트는 입금한 돈을 떼먹고 사라졌다.

A씨 같은 피해자가 속출하면서 이른바 ‘먹튀’ 도박 사이트를 감별해주는 검증 사이트까지 등장했다. 25일 한 검증 사이트에서는 A씨를 속였던 사이트를 포함, 수백개의 먹튀 사이트가 올라와 있었다. 이들은 “안전한 베팅을 할 수 있도록 돕는다”며 불법도박 이용자들을 안심시켰다. 이용자들에게 먹튀 사이트 제보도 받고 있었다.

언뜻 불법도박을 방지하는 듯 보이지만 검증 사이트는 오히려 불법도박 사이트의 홍보 창구다. 사이트에는 ‘먹튀 검증 사이트 인증 업체’ 광고 배너가 버젓이 자리 잡고 있었다. 경찰 관계자는 “검증 사이트에 ‘이곳은 먹튀 사이트가 아니다’고 정보를 올려 역으로 접속을 유도하는 수법”이라고 설명했다.

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2015년쯤 검증 사이트가 처음 등장했을 때는 사이버 도박꾼들끼리 정보를 공유하자는 취지였지만 점차 도박 사이트를 홍보하는 곳으로 변질됐다. 이는 온라인 도박판이 팽창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사행산업통합감독위원회가 발간한 ‘제3차 불법도박 실태조사 최종보고서’에 따르면 2011년부터 2015년까지 불법도박 유형에서 온라인 도박이 차지하는 비중은 22.8%에서 29.9%로 늘었다. 25조원에 이르는 규모다.

먹튀 검증 사이트가 불법도박을 오히려 조장하고 있지만 이를 차단할 법적 근거는 명확지 않다. 실제 도박 행위가 이뤄지지 않기 때문에 차단하거나 단속하기 어렵다. 방송통신위원회에서 요구하는 채증 요건에는 불법도박 사이트 로그인 기록, 베팅 기록, 입출금 기록 등이 포함된다.

사행산업통합감독위원회 관계자는 “실제 베팅이 이뤄지지 않는 사이트는 처벌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악용해 법망을 교묘히 피해가려는 수법”이라고 말했다. 경찰 단속도 쉽지 않다. 경찰청 관계자는 “불법도박 사이트의 경우 수시로 관련 첩보를 수집하고 수사에 나서지만 검증 사이트에 별도 팀을 꾸려 상시 모니터링할 수는 없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검증 사이트에도 적절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곽대경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검증 사이트는 사람들의 ‘불안심리’를 역으로 이용해 안전한 일을 하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켜 도박으로 끌어들인다”고 분석했다.

장윤식 한림대 국제학부 교수는 “단속에만 의존할 게 아니라 도박의 폐해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사회적인 홍보도 병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글=임주언 이형민 기자 eon@kmib.co.kr, 그래픽=이석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