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역적: 백성을 훔친 도적’이 끝났다. 요즘은 정통사극보다 퓨전사극이 대세인 게 좀 못마땅하지만 그래도 역사상 중요한 시기를 통과하는 우리에게 이 드라마가 어떤 화두를 던질지 궁금해 도무지 텔레비전을 떠날 수 없었다.
주옥 같은 대사도 많았고 오늘의 정치현실을 시원하게 비꼬는 ‘사이다 풍자’도 넘쳤지만 그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그저 적절한 타이밍에 터져 나와 극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한 드라마 삽입곡이 참 좋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특히 ‘1980년 광주’를 떠올리게 하는 ‘향주목 결사항쟁’ 장면에서 사지에 몰린 홍길동을 응원하며 민중이 함께 ‘익화리의 봄’을 부르던 장면은 단연 이 드라마의 백미였다.
“봄이 와도 봄이 온다 말을 못 하고 동장군이 노할까 숨죽여 웃는다. 해가 떠도 해가 뜬다 말을 못 하고 밤바다가 노할까 숨죽여 웃는다. 에헤에야 어허어야 사립문을 열어두시오. 에헤에야 어허어야 칼바람이 멎을 것이니.”
드라마에서 이 노래가 나올 때마다 나도 모르게 따라 부르곤 했다. 그렇게 부르노라면 어느새 가슴이 뭉클해져서 눈물이 줄줄 흘렀다. 다른 노래 ‘봄이 온다면’도 중독성이 있지만 한국인의 유전자에는 흥보다 한이 더 깊이 새겨진 탓인지 ‘익화리의 봄’이 훨씬 더 진하게 와 닿았던 것 같다.
어디 그 노래뿐이랴. 노래 자체가 본래 전염성이 있는 게 아닐까. ‘서동요’만 해도 그렇다. 백제의 서동이 흠모하던 신라의 선화공주와 혼인에 이를 수 있었던 건 순전히 노래 덕분이었다. 신라의 서울 한복판에서 아이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지 않았던들 그의 연모는 한낱 ‘한여름 밤의 꿈’에 지나지 않았으리라.
기왕 노래의 힘을 곱씹는 마당에 발트 3국의 ‘노래 혁명’(Singing Revolution)을 지나칠 수 없다. 발트 3국은 발트해 남동해안에 위치한 세 나라인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를 가리킨다.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이 나라들은 예로부터 이민족과 강대국의 침입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다가 18세기에 러시아의 영토가 됐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의 종식과 더불어 독립을 맞이했는데 해방의 기쁨도 잠시, 야만적인 국제정치에 휘말려 1940년에 또다시 소련의 지배 아래 들어갔던 것이다.
1985년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토로이카’가 뒷심을 잃으며 연방 전체에 분열의 조짐이 보이자, 발트 3국 주민들의 가슴에도 서서히 봄의 노래가 깃들기 시작했다. 1989년 8월 23일, 에스토니아의 탈린에서부터 라트비아의 리가를 거쳐 리투아니아의 빌뉴스에 이르기까지 장장 640㎞ 인간 사슬이 만들어졌다. 에스토니아인 70만, 라트비아인 50만, 리투아니아인 100만을 합쳐 무려 220만 명이 손에 손을 붙잡고 찬송가와 민속노래를 부르며 자유를 외쳤다. 이 노래 혁명으로 세 나라는 마침내 독립을 맞이했던 것이다.
지난주 5·18 기념식장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이 9년 만에 제창됐다. ‘그까짓 노래가 뭐라고’ 이 소동인가. ‘합창’이면 어떻고 ‘제창’이면 또 어떤가. 지청구를 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런데 이 노래를 함께 부르지 못하도록 입에 재갈을 물린 사람들은 알고 있다. 노래는 결코 ‘그까짓’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특히 이처럼 잠자는 가슴에 불을 지르는 노래라면 더더욱 위험하다는 사실을.
로마제국이 봉인시킨 예수의 노래도 무덤을 뚫고 나오지 않았던가. 노래의 혁명이다. 노래가 혁명이다.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펼치겠노라 다짐하는 뜨거운 노래 혁명은 이미 시작됐다. 다시 봄이다.
구미정(숭실대 초빙교수)
[시온의 소리] 노래가 힘이다
입력 2017-05-26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