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송병구] 정동 답사로 본 과거 속 현실

입력 2017-05-25 17:31

모처럼 토요일 낮에 정동나들이를 다녀왔다. 새 대통령이 취임한 주말이었다. 사학과 출신 아내를 쫓아 대학동문회 번개답사에 동행한 것이다. 1960년대 백발의 선배들과 1990년대 중년의 후배들까지 어울린 세대를 넘어선 학번은 늦봄의 따가운 햇살도 아랑곳 않고 정동길과 덕수궁 돌담을 따라가며 가다 서다를 반복하였다.

역사를 따라 걷는 길은 이화외고 앞에서 출발하였다. 이곳은 경인철도의 종착역인 옛 경성정거장이 있던 자리였다. 1900년 경인선이 개통하면서 제물포항에 도착한 외국인들은 하룻밤도 지체하지 않고 단숨에 서울 안까지 들어올 수 있었다. 1915년 서대문과 서소문은 철거되었지만, 옛 돈의문의 흔적을 더듬으면서 우리가 순간이동한 곳은 구한말의 정동이었다.

역사적 상상력을 동원할 것도 없이 정동은 19세기 말과 같은 풍경이 여전히 머물고 있었다. 당시 정동 거리는 개항기 서울을 대표하는 외교타운이었다. 1883년에 미국공사관이 이곳에 자리 잡으면서 이듬해에는 영국공사관, 다음해에는 러시아공사관 그리고 해가 멀다하고 프랑스 공사관과 독일, 벨기에, 이탈리아 영사관들이 차례로 들어섰다.

외국인이 모여들면서 자연스레 교회, 학교, 병원, 호텔들이 세워졌는데 선교의 자유와 함께 선교사들이 자리 잡은 곳도 정동이었다. 정동 길을 경계로 서쪽으로는 미 감리교회가, 동쪽으로는 미 장로교회가 터를 잡았다. 이후 덕수궁이 확장되면서 장로교 시설들은 대부분 옮겨갔지만, 정동제일교회를 비롯해 이화와 배재학당 등 감리교회 뿌리는 아직 건재하다. 구한말 혼란기에 증인노릇을 한 손탁호텔은 표지석으로만 남아 있으나,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중명전은 지금 ‘공사 중’으로 존재를 증명하고 있었다.

정동길에서 소공로길까지 답사의 처음과 끝, 그 가운데 고종이 있었다. 왕은 1896년 2월 11일 새벽,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공사관으로 몸을 피했다. 아관파천(俄館播遷)이었다. 일본 낭인들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乙未事變) 이후 왕의 신변까지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후 정동 일대는 15년 동안 조선정치의 중심이었고, 정동길은 근대사의 뇌관과 같았다.

일본 등 열강의 세력다툼 틈바구니에서도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환구단에서 황제의 자리에 오른 고종은 결국 1907년 헤이그밀사 사건 이후 강제로 물러나고, 1919년 유명을 달리할 때까지 덕수궁을 떠나지 않았다. 그를 가리켜 풍운의 고종 황제라고도 하고, 비운의 고종 임금이라고도 할 만큼 수심 깊은 왕의 행적은 덕수궁 담장 사이 줄타기처럼 아슬아슬하였다.

2017년 정동거리는 활기찼다. 돌담길은 마지막 봄볕을 즐기는 자유로운 시민들로 가득했고, 대한문 앞에는 크게 위축된 태극기집회로 웅성거렸다. 즐비한 공사관들의 위세는 옛 대한제국을 둘러싸듯, 현 대한민국을 에워싸고 있었다. 비운의 전 대통령이 물러가고 풍운의 새 대통령이 들어섰지만 사드배치, 위안부 합의, 북한의 핵실험 따위에서 보듯 국제관계의 실타래는 복잡하게 엉켜 있다. “역사는 과거의 정치고 정치는 현재의 역사다”(존 로버트 실리)란 말이 실감난다. 새 정부는 여전히 역사의 멍에를 짊어지고 있다.

새 대통령이 광화문 시대를 선언한 것은 이젠 구중궁궐에 머물지 않으려는 의지일 것이다. 더 이상 100여년 전, 72년 전, 9년 전, 과거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고 미래의 희망을 새롭게 쓰겠다는 결기처럼 보인다. 주요국에서 취임축하를 받고, 4대 강국에 특사를 파견했지만 본격적인 힘겨루기는 이제부터다.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가라.”(렘 6:16)

송병구 색동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