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d 트렌드] 생활로 확산되는 ‘멍때리기’

입력 2017-05-26 05:00
지난달 30일 서울 마포구 망원한강공원에서 ‘2017 한강 멍때리기 대회’에 출전한 가수 MC그리가 멍하니 앉아 있다.
충북 충주시 노은면 ‘깊은 산속 옹달샘’ 명상센터에서 ‘멍스테이’ 프로그램 참가자들이 숲을 바라보며 편안하게 ‘멍때리는 시간’을 갖고 있는 모습.
직장인 김모(34·여)씨는 얼마 전부터 퇴근 후 회사 앞 공원을 자주 찾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게 앉아 시간을 보낸다. 짧게는 30분, 길게는 1시간을 넘길 때도 있다. 김씨는 "아침에 눈을 뜬 순간부터 손에서 놓지 못하는 스마트폰과 쏟아지는 업무에 쉽게 피로해져서 일주일에 두 번씩 공원에 간다"며 "혼자 '멍때리는' 시간을 갖는데, 무의미해 보여도 스트레스가 풀리고 재충전이 된다"고 말했다. 정보과잉 시대. 스마트폰을 비롯한 각종 디지털 기기 덕에 정보 수집이 매우 용이해졌다. 정보의 유통속도도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지고 있다. 그만큼 우리 뇌는 더 많이 혹사당한다. 컴퓨터의 여러 기능을 한꺼번에 사용하면 과부하에 빠지듯, 뇌도 처리할 정보가 너무 많아지면 힘겹다는 신호를 보낸다. 신체적, 정신적 피로감을 통해 전달되는 뇌의 신호를 바쁜 현대인은 놓치기 일쑤였다. '멍때리기'라는 어설퍼 보이는 행동에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된 건 이 때문이다. 아무 생각 없이 넋 놓고 있는 상태를 말하는데, 과거에는 '시간낭비'나 '쓸데없는 짓'을 뜻하는 부정적 의미로 사용됐다. 최근에는 현대인의 뇌를 쉬게 해주고 생각을 정비하는 '창조의 시간'으로 여겨지고 있다.

피로한 뇌의 ‘초기화’, 멍때리기

지난달 30일 서울 마포구 망원한강공원에서 ‘멍때리기 대회’가 열렸다. 2014년 시작된 이 대회는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의 의미를 느끼게 하자”는 취지에서 기획됐다.

첫 대회 경쟁률은 4대 1에 그쳤다. 해마다 참가자가 늘어 올해는 하루 만에 3500명이 신청했고, 50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주최 측은 ‘다양한 연령대’ ‘직업군’ ‘인상적인 참가신청 사유’ 등을 검토해 선수 70명과 예비선수 10명을 선발했다.

선수들은 직업을 드러내는 복장을 입고 90분간 각자의 자리에서 ‘멍’을 때린다. 스마트폰 사용, 졸음·잠자기, 시간 확인, 잡담, 웃음, 음식물 먹기, 독서 등을 하면 탈락이다. 진행요원들이 10분 간격으로 심박수를 체크한 기술점수와 대회를 관람하는 시민들의 인기투표 결과를 합산해 가장 많은 표를 받은 사람이 우승자로 선정된다. 우승자에게는 로댕의 조각품 ‘생각하는 사람’ 모양의 트로피와 다음 국제대회 초대권, 상장 등이 수여된다.

올해 우승은 대학 동창끼리 잠옷을 입고 참가한 이종덕씨 등 2명에게 돌아갔다. 이씨는“일을 하다보면 머리가 굳을 때가 있는데 앉아서 멍때리면 활력을 얻고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 참가했다”며 “우승까지 하게 돼 기쁘다”고 말했다.

멍때리기는 의학용어로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Default Mode Network)’라고 불린다. 2001년 미국 워싱턴대학 의대 마커스 레이클 교수가 뇌는 ‘사용할수록 활성화된다’는 기존 연구이론을 뒤집고 ‘인간의 뇌에는 생각에 몰두할 때 활동이 줄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일 때 오히려 활성화되는 영역이 있다’고 발표한 데서 비롯됐다.

레이클 교수는 이렇게 활성화되는 부위를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라고 명명했다. 컴퓨터를 리셋하면 초기 설정 상태(default)로 돌아가는 것처럼 사람의 뇌도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고 휴식을 취할 때 피로가 쌓이기 전의 초기 상태를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난 8일 미국 디지털경제매체 ‘쿼츠’도 스탠퍼드대학 자비·이타심연구교육센터 에마 세페라 과학분과장의 연구를 인용해 ‘창의성에 가장 큰 걸림돌은 지나치게 바쁜 것’이라고 보도했다. 현대인이 열심히 일하는데 창의적 성과가 나오지 않는 것은 뇌가 휴식 없이 필요 이상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멍때리는 중이니 방해하지 마세요”

최근에는 생각과 마음을 비우기 위해 멍때리기 좋은 명소를 찾아 떠나는 사람도 늘고 있다. 충청북도 충주시 노은면의 명상센터 ‘깊은산속옹달샘’도 그런 장소 중 하나로 꼽힌다. ‘고도원의 아침편지’로 유명한 고도원 작가가 2010년 설립한 치유힐링센터로, 주말이면 ‘멍스테이’ 참가자들로 북적인다.

멍스테이는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찾아 휴식하며 깊은 대화를 나누자’는 취지로 기획됐다. 특별한 프로그램이나 강의도 없다. 그저 각자 원하는 방식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가지면 된다. 커피를 마시며 하염없이 창밖을 바라보는 사람, 책을 읽다가 멍하니 앉아 있는 사람의 모습은 이곳에서 전혀 어색하지 않다.

참가자에게는 ‘침묵의 배지’가 주어진다. 이 배지를 단 사람은 멍때리는 중이니 방해하지 말아 달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또 식사를 하거나 산책을 하다 종소리가 나면 하던 동작을 멈추고 멍때리기에 들어가야 한다는 게 이곳 멍스테이의 유일한 규칙이다.

고도원 작가는 “멍스테이의 첫 단계는 멈춤”이라며 “종을 치는 건 이 10초간의 짧은 멈춤과 침묵을 통해 음식 맛과 향기를 느끼고 자연의 소리를 듣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근육은 운동할 때가 아닌 쉬는 동안 회복하고 성장한다. 뇌도 마찬가지다. 시간과 공간만 있으면 어디서나 가능한 멍때리기는 뇌를 회복시키는 데 가장 쉽고 효과적인 치유법”이라고 강조했다.

‘불멍’ ‘물멍’… ‘좋은 멍’ ‘나쁜 멍’

미국인 벤저민 베넷은 2014년부터 유튜브를 통해 일주일에 한두 번씩 ‘앉기와 웃기’라는 콘셉트로 실시간 방송을 진행하고 있다. 벤저민은 빈방에서 허리를 곧게 펴고 앉아 4시간 동안 환하게 웃고 있는데, 이것이 프로그램의 시작이자 끝이다. 지루하고 무료해 보이는 이 동영상은 2만명이 넘는 시청자를 확보하고 있다. 한 시청자는 댓글을 통해 “가만히 앉아 웃고 있는 벤저민을 보는 것만으로 힐링이 된다”고 했다. 벤저민은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세상을 바꾸고 싶다. 멍때리기는 시간 낭비가 아니라 새로운 가치를 만드는 생산적 활동”이라고 말했다.

멍때리는 방법과 종류도 점점 다양해지고 있다. 지글거리는 모닥불이나 향초를 켜놓고 멍하니 바라보는 ‘불멍’, 어항 속 물고기를 보며 멍때리는 ‘물멍’이 대표적이다. 최근에는 바다를 멍하게 바라보는 ‘바다멍’도 등장했다. 이를 위해 직접 해변을 찾는 사람도 있고, 바다 모습과 파도치는 소리만 들려주는 동영상을 찾아 저렴하고 편안하게 멍때리는 사람도 늘고 있다.

동전의 양면처럼 멍때리기에도 ‘좋은 멍’과 ‘나쁜 멍’이 있다. 책 ‘멍때려라’의 저자인 서울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신동원 교수는 “좋은 멍때림은 과거의 여러 경험과 정보를 편집하고 재구성해 통찰을 얻을 수 있고 다가오는 미래에 대한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는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반면 “나쁜 멍때림은 원하지 않는 생각에 계속 머무르게 한다. 나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부정적인 ‘감정 기억’이 지속돼 우울 불안 등 해결책 없는 감정소모로 이어질 수도 있다. 지나치게 많이 자주 멍때리는 것도 좋지 않다“고 조언했다.

아이작 뉴턴은 사과나무 아래서 멍때리다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했고, 고대 그리스의 아르키메데스는 목욕탕에서 멍때리다 흘러내리는 물을 보고 ‘부력의 원리’를 찾아내 “유레카”를 외쳤다. 멍때리기 좋은 계절 6월이 다가오고 있다. 바쁜 일상에서 잠시 몸과 마음에 휴식을 주면 어떨까. 어쩌면 우리에게도 유레카의 순간이 찾아올지 모를 일이다.

박효진 기자imher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