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액·장기 연체 빚 탕감해준다는데… 50대·15년∼25년 연체자 최대 수혜
입력 2017-05-25 19:45
서울 강서구에 사는 전모(61)씨는 한때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았다. 작은 회사를 운영하며 직장에서는 ‘사장님’ 소리를 들었고 가정에선 아내와 삼남매의 든든한 가장이었다. 하지만 전씨의 삶은 ‘IMF 외환위기’ 후 반전됐다. 사업은 실패했고 회사 법인채무 보증인으로 설정돼 있어 집과 재산 일체를 경매 처분당했다.
공중분해된 것은 회사만이 아니었다. 함께 살던 집을 잃자 가족들은 집값이 싼 지방으로 내려갔고 전씨 홀로 서울에 남아 고군분투했다. 그래도 빚의 족쇄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다 갚지 못한 빚 때문에 전씨의 거주지나 직장에 추심원이 갑자기 들이닥치는 일이 빈번했다. 금융계좌가 압류돼 직장도 그만둬야 했다. 때문에 빚을 갚는 것은 더욱 어려워졌다. 결국 가족들과 연락도 끊겼다.
전씨는 최근 시민단체 ‘주빌리은행’에서 원리금 314만3626원의 채권을 소각해준 뒤에야 삶의 일부를 되찾았다. 건물 경비원 자리를 구했고 신용회복위원회의 워크아웃 상담도 받기로 했다. 전씨는 직장을 구한 덕에 20여년 만에 가족과 재회할 수 있었다.
전씨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갚을 의지가 있어도 능력이 없는 이들을 옥죄는 빚은 채무자에게 끝까지 달라붙지만 채권자에게 실익은 없다. 24일 금융권에 따르면 문재인정부는 국민행복기금이 보유한 소액·장기연체 채권을 소각해 채무를 탕감해주기로 했다. 또 다른 ‘전씨’들을 ‘양지(陽地)’로 끌어오겠다는 것이다. 서민금융진흥원이 운영하는 국민행복기금이 보유한 1000만원 이하, 10년 이상 연체 채권 잔액은 총 4조4848억원 규모다. 채무자 수는 123만3000명에 이른다. 특히 채무조정 약정 체결이 어려울 정도로 상환 능력이 떨어지는 ‘순수 미약정자’만 40만3000여명이다. 채무조정 약정을 채결하지 않았다는 것은 채무자의 소득이나 재산 현황이 파악되지 않았고 상환능력 심사도 이뤄지지 않았다는 의미다.
지난달 4400억원 규모의 채권을 소각한 신한은행의 사례를 보면 소액·장기연체 채권 소유자는 어떤 사람들인지 엿볼 수 있다. 신한은행은 지난달 제1금융권 최초로 1만9424명의 소멸시효 완성채권을 소각했다. 이를 통해 “기초생활수급자 등 사회적 배려가 필요한 계층의 금융거래 정상화를 기대한다”고 설명했다. 소멸시효 완성채권은 채권자가 돈 받을 권리를 소멸시효 기간 안에 행사하지 않아 채무자의 갚을 의무가 사라진 채권을 말한다. 회수가 불가능해 이미 은행 재무제표상에서도 지워졌다.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제윤경 의원이 신한은행으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소멸시효 완성채권의 채무자들은 ‘50대 이상’ ‘1000만원 이하’ ‘연체기간 10년 초과’가 많았다. 우선 채무금액 기준으로는 1000만원 이하의 빚을 진 채무자가 1만7512명으로 90%에 가까웠다. 이들의 포기 원리금 총합은 2187억원으로 소각한 소멸시효 채권 규모의 절반에 육박했다. 연령별로는 50대가 7070명으로 가장 많았고, 60대(5455명), 70대 이상(3774명) 순으로 뒤를 이었다. 연체기간 기준으로는 ‘15년 초과 25년 이하’가 8288명, ‘10년 초과 15년 이하’ 5222명 등으로 10년 이상 연체한 채권이 상당부분을 차지했다. 사회적배려자(사망자 고령자 기초수급자 등)의 채무 등은 소멸시효를 채우지 못했어도 일부 소각됐다.
제 의원은 “아직 은행권에 남아있는 소멸시효 완성채권은 약 5조원에 달한다”며 “더 많은 은행의 따뜻한 동참을 바란다”고 말했다.
글=홍석호 기자 will@kmib.co.kr, 그래픽=이은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