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오전 10시1분 서울중앙지법 417호 대법정. 592억원대 뇌물수수 등 18개 혐의로 구속 기소된 박근혜 전 대통령이 여성 교도관 2명에게 이끌려 법정에 들어섰다. 플라스틱 핀을 이용해 미용실 원장의 도움 없이 스스로 올려붙인 탓인지 머리카락은 다소 헝클어져 있었다. 얼굴도 부어 있었다. 수의(囚衣) 대신 입은 군청색 재킷 왼쪽 옷깃에는 하얀 배지가 달렸다. 배지에는 수인번호 503이 적혀 있었다.
박 전 대통령은 법대에 앉은 재판장 김세윤(50·연수원 25기) 부장판사와 주심 심동영(38·연수원 34기) 우배석판사, 조국인(37·연수원 38기) 좌배석판사를 외면한 채 피고인석으로 천천히 걸었다. 자신의 변호인 유영하 변호사에게만 가볍게 고개를 숙인 뒤 자리에 앉았다. 통상 피고인은 입정(入廷)하며 재판부를 향해 목례를 하는 게 관례다.
1분 뒤 최순실씨가 법정에 들어섰다. 종종걸음으로 피고인석으로 향하던 최씨는 박 전 대통령을 슬쩍 곁눈질했다. 자리에 앉은 두 사람은 묵묵히 정면만 응시했다. 재판부의 사전 허가로 이뤄진 2분가량의 포토타임에서도 표정 변화는 없었다. 사진·영상 취재진이 모두 퇴장하자 최씨는 고개를 숙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피고인석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유 변호사와 박 전 대통령, 이 변호사와 최씨가 차례로 앉았다. 뇌물 공여 혐의로 함께 기소된 신동빈 롯데그룹 부회장과 그 변호인이 가장 왼쪽에 자리했다.
박 전 대통령과 최씨는 이경재 변호사(최씨 변호인)를 사이에 두고 1m 거리에 나란히 앉았지만 서로에게 눈길 한 번 건네지 않았다. 박 전 대통령은 법정 정중앙 벽면에 걸린 법원 휘장을 바라보거나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를 올려다보면서도 최씨 쪽으로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최씨는 3시간에 걸친 재판 내내 담담한 표정을 보이려 애썼다. 국정농단 사건 수사가 본격화한 지난해 11월부터 40회 이상 형사 법정에 선 최씨는 재판 절차나 분위기에는 익숙했다. 하지만 긴장한 기색을 완전히 감추지는 못했다. 이따금 숨을 크게 들이마시는가 하면 뿔테 안경을 위아래로 만지작거렸다. 박 전 대통령은 직업·주소지 등을 확인하는 인정신문 절차 때 피고인석에서 일어나 자신의 직업을 “무직”이라고 말했다. 주소지는 이미 매각한 서울 삼성동 주택 주소를 댔다. 이에 최씨는 감정이 격해진 듯 잠시 눈시울을 붉혔다. 박 전 대통령과 최씨 모두 국민참여재판은 거부했다.
최씨는 공소사실에 대한 본인 의견을 말하다 말고 박 전 대통령 변론에 나서기도 했다. 최씨는 “40년간 지켜봐 온 박 대통령을 법정에 나오게 해 내가 너무 많은 죄를 지은 죄인 같다”며 “박 전 대통령은 뇌물이나 이런 걸로 나라를 움직이거나 기업들에 그런 걸(뇌물 요구 등)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대통령님은 더블루케이 같은 회사가 미르·K스포츠재단에 어떻게 연결됐는지도 모르고 (재단을 통해) 문화·체육 발전을 꾀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걸로 안다”며 “문화계 블랙리스트 책임까지 대통령에게 묻는다면 살인범을 낳은 어머니에게 살인죄를 묻는 것”이라고도 했다.
재판은 “생리 현상을 해결해야 한다”는 최씨 측 요청으로 한 번 휴정했다가 오후 1시에 끝났다. 일반인 방청객 조모(48·여)씨는 “재판을 보니 국민이 대통령을 정말 잘 끌어내렸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글=양민철 황인호 기자 listen@kmib.co.kr, 그래픽=박동민 기자
‘셀프 올림머리’ 한 朴, 최순실에 눈길도 안줬다
입력 2017-05-24 05: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