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안 해변길 트레킹, 바람·바다·노을·숲이 빚은 이국적인 풍경

입력 2017-05-24 20:54
충남 태안군 원북면 먼동해변 거북바위가 해질 무렵 소나무와 어우러진 실루엣으로 환상적인 풍경을 자아내고 있다. 먼동낙조는 태안반도의 꽃지와 운여해면 일몰에 뒤지지 않는다.
금개구리 서식지 두웅습지에 수련이 피어 있다.
하늘 바다 바위가 아름답게 어우러진 학암포해수욕장
‘신비의 모래언덕’ 신두리해안사구에 활짝 핀 해당화가 진홍빛 자태를 뽐내고 있다.
느릿느릿 걸으면 아픔을 어루만져주는 길이 있다. 구불구불 돌아가는 해안을 따라 펼쳐지는 절경과 파도, 따스한 갯바람이 찌든 가슴을 씻어주고 짙은 소나무숲이 허전한 마음에 향기를 불어넣는다. 길을 걷다 마주친 길섶의 작은 꽃들이 재잘댄다. 충남 태안의 ‘해변길’이다. 그 가운데 태안의 북쪽 학암포에서 신두리에 이르는 1코스 ‘바라길’을 걸었다.

태안은 뭍에서 서해로 툭 튀어나와 위아래로 길게 뻗어 있다. 태안읍을 가운데 두고 아래쪽에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안면도와 천수만이 있다. 하지만 위쪽도 ‘아는 사람’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고 있다.

태안 해변길은 원북면 학암포에서 출발해 안면도 영목항까지 이르는 120㎞를 갯마을과 조붓한 고샅길을 따라 걷는 길이다. 태안반도 위쪽부터 각 지역 특징에 따라 바라길, 소원길, 솔모랫길, 노을길, 바람길로 이어진다. 곰솔림, 해변, 해안사구를 걸을 수 있고 갯벌과 양식장 및 해넘이 등을 살펴볼 수 있다.

그 아름다움 속에는 아픔이 녹아 있다. 2007년 12월 태안 앞바다에서 유조선 좌초 사고로 원유가 유출되면서 수년 동안 바다의 생태계가 파괴됐다. 하지만 자원봉사자와 정부, 지자체 등의 노력으로 예전의 청정한 모습을 되찾았다.

바라길은 바다의 옛말 ‘아라’에서 유래됐다. 신두리 해안사구와 해변과 해변을 잇는 아름다운 소나무숲과 바다를 두루 걷는 길이다. 학암포 해변에서 시작해 신두리 해안사구까지 가는 총 12㎞다. 빨리 걸으면 4∼5시간, 천천히 걷는다 해도 5∼6시간이면 된다. 크게 가파른 구간이 없어 산책하듯 즐길 수 있다. 상큼한 산림향과 싱그러운 바다내음을 느낄 수 있다.

학암포에서 신두리로 향하지 않고 반대로 가는 길을 택했다. 이국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 신두리 해안사구를 먼저 보고 싶어서다. 신두리해안사구센터 뒷문을 통해 사구로 향하면 다큐멘터리 영화에서나 봄 직한 사막이 느닷없이 눈앞에 다가선다.

천연기념물 제431호인 신두리해안사구는 길이 3.4㎞, 폭 0.5∼1.3㎞로 해변을 따라 기다랗게 펼쳐져 있는 국내 최대 규모의 해안사구다. 파도에 떠밀려온 모래가 오랜 세월 바람에 날리며 쌓여 형성된 신비의 모래언덕이다.

해안사구 입구에 서 있는 돌로 된 거대한 안내문을 지나면 데크 탐방로가 이어진다. 1만5000년 동안 바람이 쌓은 ‘모래성’은 사막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을 풍긴다. 탐방로 옆에는 동보리사초 사이로 개미귀신이 파놓은 모래함정이 지천이다. 사구 전망대에 올라서면 ‘한국의 사막’이 실감난다. 언덕 표면의 고운 모래에 바람이 물결 모양의 환상적인 ‘그림’을 그려놓았다. 실뱀의 군대가 전진한 듯한 모습이다. 모래 위를 표범장지뱀이 날랜 걸음으로 줄달음친다.

높고 낮은 부드러운 굴곡을 지닌 오롯한 모래언덕이 있는가 하면 이름 모를 풀이나 억새로 뒤덮인 언덕, 순비기나무나 해당화와 같은 관목이 군락을 이룬 언덕 등 다양한 모양과 식생을 가진 언덕이 이어진다.

요즘 모래 언덕에는 해당화가 진홍색 꽃망울을 활짝 터뜨려 고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푸른 바다와 하늘, 은빛 모래언덕과 어울려 하늘거리며 아름다운 풍경을 자아내고 있다. 해당화는 해변 모래땅에 무리 지어 생육하는 장미과 낙엽 관목으로, 7월까지 꽃을 피우다가 방울토마토 크기의 붉은 열매를 맺는다.

얼마전까지 모래 언덕은 누구나 오를 수 있게 개방돼 있었다. 하지만 최근 ‘문화재’ 보호를 위해 접근을 엄격히 금지한다. 아름다운 모습을 가까이서 보려고 모래언덕으로 다가서면 바로 ‘경고’ 방송이 나온다. 주변에 설치된 CCTV를 통해 관람객의 움직임이 관리실로 바로 전송되기 때문이다.

인근 두웅습지도 가보자. 금빛 띠는 금개구리 서식지로 알려진 곳으로 신두리해안사구에서 약 1㎞ 떨어져 있다. 2002년 사구습지로는 처음 보호지역으로 지정됐고 2007년에는 람사르 습지로 등록됐다. 숲으로 둘러싸인, 길이 200m, 폭 100m가량의 작은 습지 주변에 나무 탐방로가 설치돼 습지 일부를 거닐며 동식물을 관찰할 수 있다. 입구에 대표 동물인 금개구리 상(像)이 습지를 지키고 있다.

신두리 해변 북쪽으로 향하면 해안을 따라 소나무가 하늘을 덮은 제방길이 이어진다. 그 길 끝에서 계단을 따라 숲길로 오르면 모재로 이어진다. 바닷바람이 고개를 타고 넘어와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씻어준다. 길은 솔잎이 깔린 소나무숲길이다. 상쾌한 피톤치드가 폐부 깊숙이 스며든다. 숲길을 걷다 보면 곧 모재 전망대가 나온다. 소나무 사이로 아래쪽에 아담한 몽돌 해변이 시야에 들어온다. 이어 ‘능파사'를 지나 바닷가로 내려서면 쉼터가 있고 그 옆에 샘물이 길손의 목을 적셔준다.

파도소리를 길동무 삼아 숲길을 한참 걸으면 길은 바닷가 쪽으로 내려선다. ‘먼동해변’이다. 길지 않은 해안선이 뭍으로 쑥 들어온 덕에 갯바위와 바다로 튀어나온 육지가 사위를 에두르며 고즈넉하고 편안한 풍경을 빚어낸다. 20여년 전 ‘먼동’이라는 TV드라마에 등장하면서 이름이 먼동해변이 됐다. ‘야망의 전설’ ‘불멸의 이순신’ 등 숱한 드라마에 해변이 등장한다. 거북을 닮은 ‘거북바위’에 소나무 두 그루가 운치 있다. 그 너머로 바위섬 하나가 겹쳐진다. 한 폭의 산수화에 빠진 듯한 기분이 든다. 해넘이도 아름답다. 해가 기울면 바다가 붉은 물결로 춤을 추기 시작한다. 해변의 노송은 장엄하게 지는 해 속에 실루엣으로 빨려든다. 그래서 먼동낙조는 안면도 꽃지·운여 등 태안의 일몰명소에도 뒤지지 않는다.

먼동해변을 지나면 구례포에 닿는다. 갯벌이 없어 물이 깨끗한 곳이다. 철이 이른 해변은 한적하다. 혼자 즐기기에는 아까울 정도로 고운 백사장이 드넓게 펼쳐져 있다. 바로 옆 솔숲에는 석갱이오토캠핑장을 비롯해 사설로 운영되는 캠핑장이 여럿 있다.

해변 솔숲을 따라 종착지 학암포로 간다. 학(鶴)이 노닐던 바위(岩)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아름다운 바위가 난초와 어우러져 절묘한 조화를 이뤄낸다. 기름유출 사고 당시 학암포해수욕장 앞바다에 유조선이 있었다. 사고에 따른 ‘절망의 시기’를 견뎌낸 바라길은 이제 상처입은 도시인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치유의 길’로 태어나고 있다.

여행메모

태안읍에서 학암포 방면 634번 지방도… 깔끔하고 구수한 박속밀국 낙지탕 별미


승용차로 충남 태안의 신두리해안사구로 가려면 서해안고속도로 서산나들목에서 빠져나와 32번 국도를 타고 태안으로 들어간다. 태안읍에서 603번 지방도를 이용, 학암포 방면으로 가다 반계교차로에서 11시 방향 634번 지방도를 잠시 탄 뒤 닷개삼거리에서 왼쪽 신두리 이정표를 보고 빠지면 된다. 학암포로 가려면 그대로 직진한다. 태안읍에서 학암포나 구례포로 가는 버스가 1시간에 1대꼴로 운행된다.

신두리사구는 진입 방향에서 가장 끝, 신두리의 북쪽에 위치한다. 사구 초입에 사구센터가 있다. 입장료는 무료다. 두웅습지는 사구에서 산책로를 따라 걸어서 갈 수도 있고, 신두3리를 거쳐 차로도 닿을 수 있다.

태안에서는 박속밀국낙지탕이 별미다. 하얀 박속과 낙지를 한데 넣어 끓이는 토속식품으로 박속의 깔끔한 맛과 낙지의 구수함이 입맛을 돋운다. 특히 6∼7월에 많이 잡히는 세발낙지를 넣어 끓인 박속밀국낙지탕은 으뜸으로 꼽힌다. 원북면 소재지에 있는 원풍식당(041-672-5057)에서는 박으로 맛을 낸 국물에 낙지를 살짝 익혀 먹고 수제비나 칼국수를 넣어 걸쭉하게 해서 먹는다.

태안=글·사진 남호철 여행선임기자 hcnam@kmib.co.kr, 그래픽=박동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