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한국에 보수정권이 들어서자 미국은 반색했다. 그해 4월 첫 방미길에 오른 이명박 대통령은 환대를 받았다. 미국 대통령 별장인 캠프데이비드에 한국 대통령으로는 처음 초대됐다. 현장을 취재하면서 골프 카트에 앉아 “내 친구야(He’s my friend)”를 주고받던 두 대통령을 목도했다. 당시 청와대 고위 관계자가 은근하게 전해준 백악관 인사의 발언도 생생하다. “노무현정부하고는 참 맞지 않았다. 할 일은 다 했는데도….” 다시 말해 “공화당 출신의 조지 W 부시 정부와 한국의 진보 정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하지만 이라크 파병과 한·미 FTA 등 미국이 얻고자 하는 것은 다 얻어냈다”는 것이다. 노무현정부는 지지기반을 상실하면서까지 이 일들을 했지만 미국으로부터 끊임없이 동맹으로서의 진정성을 의심받아야 했다.
이명박정부가 친미(親美) 노선을 폈다면 전임 정부는 친중(親中)에 가까웠던 게 사실이다. 한국 집권당과 중국 공산당의 교류도 활발했다. 열린우리당 의장을 따라 중국에 간 일이 있는데 우리 일행은 후진타오 국가주석으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노무현 시대의 미국에서는 친중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이명박 시대 중국에선 친미에 불만을 터뜨리는 목소리가 작지 않았다.
그럼 박근혜정부는? 박 대통령은 2015년 9월 중국의 항일전승전 행사에 ‘서방국가’ 정상 중 유일하게 참석했다. 열병식이 열린 천안문광장 망루에 올라 시진핑 국가주석,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나란히 섰다. 중국 정부는 박 대통령에게 최고의 예우를 해줬고 중국 언론은 한·중 관계가 역대 최상이라고 치켜세웠다. 같은 시각, 미국 보수 진영 인사들은 한국에 대한 배신감을 토로했다. 그리고 이듬해 7월 한국 정부는 주한미군의 사드 배치를 전격 발표했다. 이후 현실은 우리가 아는 그대로다.
작년과 올해 한국은 초강대국 미국과 중국 지도자들의 민낯을 보고 말았다. 박 전 대통령을 향해 ‘라오펑유’(老朋友·오랜 친구)를 외쳤던 중국은 잔인한 사드 보복을 단행했다. 태극기를 불태우고 우리 제품을 때려 부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사드 비용 한국 부담과 한·미 FTA 재협상을 주장하고 있다. 한국 국민은 대통령 한 명이 바뀌면 혈맹인 한·미동맹의 가치보다 미국의 경제적 이득이 우선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됐다.
벌써부터 미, 중에선 한국의 새 정부가 어느 쪽으로 기울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는 얘기가 들린다. 특사 외교가 펼쳐졌지만 우려가 가신 것 같지 않다. 15년 동안 우리 대통령과 정부는 ‘친중→친미→친중→친미’를 널뛰듯 오갔다. 그런데 우리가 얻은 것은 뭔가. 얼마 전 만난 정세균 국회의장은 “우리의 외교가 지금처럼 사면초가 위기에 빠진 적이 없다”고 개탄했다.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모두 우리와 관계가 좋지 않다는 것이다. 트럼프, 시진핑, 아베, 푸틴…. 자국 이익을 위해서라면 다른 나라 친구뿐 아니라 제 가족도 안면몰수하겠다고 나설 것 같은 지도자들이다.
이런 악조건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등장한 것이다. 사드 철회를 줄기차게 요구해 온 중국은 기대감을 노골적으로 내비치고 있다. 반면 미국 내에는 또다시 중국으로 기울어진 한국 정부를 볼까봐 우려하는 기류가 조성되고 있다. 우리가 한쪽으로 줄을 서는 순간 다른 이의 ‘보복’이 불가피한 구조인 것이다. 그간의 경험에 비춰보면 줄 선 쪽에서 우리에게 줄 이득도 딱히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바보같이 드러내놓고 친미·친중 하지 말고 다른 ‘묘수’를 만들어내야 하지 않을까. 막중한 임무가 문 대통령과 그의 외교안보 참모들에게 주어졌다. 대한민국의 생존외교 전략을 짜는 그 일 말이다.
한민수 논설위원 mshan@kmib.co.kr
[여의춘추-한민수] 親美·親中, 그 이상을 봐라
입력 2017-05-23 17: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