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대통령도 ‘연차’ 쓰는데… “부장 눈치 안봐도 될까”

입력 2017-05-23 05:00
문재인 대통령이 22일 부산 영도의 모친 자택 앞에서 시민들과 셀프카메라를 찍고 있다. 전날 하루 휴가를 내고 경남 양산 사저를 찾은 문 대통령은 이날 모친을 찾아 함께 오찬을 했다. 문 대통령은 23일 경남 김해 봉하마을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 8주기 추도식에 참석한 뒤 청와대로 복귀한다. 청와대 제공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13일째인 22일 공식적으로 연차를 내고 하루 종일 휴식을 취했다. 주말인 20∼21일 근무한 뒤 쉬는 셈이라 사실상 ‘대휴’에 가깝다. 전날 오후 경남 양산으로 내려간 문 대통령은 북한 미사일 발사 후에도 상경하지 않았다. ‘노동시간 단축’ 및 ‘연차 사용을 의무화’를 공약한 문 대통령의 휴가에 전문가들은 “권위적인 노동문화에 균열이 가기 시작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문 대통령은 21일 내각 및 청와대 인선을 발표한 뒤 오후 1시쯤 헬기를 타고 부인 김정숙 여사와 함께 양산 사저로 내려갔다. 청와대는 직후 “대통령이 22일 하루 휴가를 냈다”고 발표했다. 연간 21일 주어지는 연차를 하루 소진한 셈인데, 지난 주말 근무한 뒤 대휴를 하루 얻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문 대통령은 이날 오후 부산 영도의 모친 강한옥(90) 여사 댁을 방문해 어머니, 여동생과 2시간가량 오찬을 함께한 뒤 사저로 돌아왔다. 메뉴는 평소 어머니가 좋아하는 음식인 짜장면이었다. 주민 불편을 최소화하기 위해 방문 과정에서 별도 경호차량은 동원하지 않고 버스 1대만 운용했다. 경호 인원도 최소한만 대동했다.

양산 사저 앞엔 하루 종일 방문객의 발길이 이어졌다. 일부 방문객들은 문 대통령을 직접 만나 기념촬영을 하고 사인을 받았다. 문 대통령은 22일 사저에서 지낸 뒤 23일 경남 김해 봉하마을에서 열릴 노무현 전 대통령의 8주기 추도식에 참석한다.

대통령의 이러한 휴가 풍경은 이례적이다. 역대 대통령은 3∼5일의 짧은 여름휴가를 가곤 했다. 그마저 철통같은 경호 및 보안 속에서 보냈다. 수해 등 돌발 현안이 터지면 휴가가 취소되는 경우도 있었다. 김대중정부 청와대에서 근무했던 한 인사는 “대외 요인 탓에 휴가를 못 갔던 경우도 많았지만 당시에는 휴가보다 국정을 우선시하는 게 당연하게 여겨졌다”고 회고했다. 박근혜정부 때도 마찬가지 분위기였다고 한다. 공개적으로 연차를 소진해 휴가를 간 경우가 이번이 처음인 이유다.

청와대 관계자들은 문 대통령의 연차 소진 및 양산 방문은 ‘의도적’이었다고 설명한다. 문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주당 최대 노동시간을 52시간으로 제한하고 연차 휴가 사용을 의무화하겠다고 공약했다. 여름휴가도 12일 이상으로 의무화하고 기본 연차 유급 휴가일수를 20일로 늘리는 방안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노동시간을 줄이는 만큼 추가 일자리를 확보할 수 있을뿐더러 내수 진작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거라는 인식이 강하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이번 일정은 휴가 관련 공약 이행에 대한 대통령의 의지 표현”이라며 “대통령도 연차 쓰고 휴가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라고 했다.

대통령의 연차 휴가 행보는 당장 정부 및 공공기관뿐 아니라 사기업의 휴가 관행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신광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공공기관 평가에 반영하는 방식으로 휴가 관련 공약 이행을 정부부처에 요구하면 눈치를 보던 사기업들도 따라올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어 “결국 공공기관, 대기업이 먼저 시작해야 업무 문화가 변한다. 하지만 다들 알면서도 안 해왔다”며 “대통령의 솔선수범은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했다.

문 대통령의 탈권위적인 모습 자체가 노동문화에 가져올 파급력이 적지 않을 거란 분석도 있다. 보좌진과 격의 없이 소통하고, 연차 휴가를 가며 이를 모두 국민에게 공개하는 형식 자체가 파격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야권 관계자는 “북한 미사일이 발사된 뒤 문 대통령이 청와대로 돌아올 줄 알았다”며 “‘휴가 중에는 나를 건드리지 말라’는 뜻인 것 같아 조금 놀랐다”고 말했다. 이택광 경희대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는 “대통령의 휴가를 탈권위성이라는 문화적 개념에 비춰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며 “부하 직원이 자신이 원할 때 퇴근한다는 것은 상사와의 권위적·수직적 관계에서 탈피했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한편 문 대통령은 지난 17일 사표를 제출한 김정배 국사편찬위원장을 의원면직 처리했다. 김 위원장은 국정 역사 교과서 편찬 업무를 총괄해 왔다.

글=문동성 기자, 부산=윤봉학 기자 theMoon@kmib.co.kr, 그래픽=전진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