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오후 서울 광진구 장로회신학대학 교정에는 네 명의 아이들이 활보하고 있었다. 아이들 엄마는 장신대 신대원의 몽골인 유학생 태 어트겅수랭(40)씨였다.
태씨는 수업 중간에 젖먹이 아이에게 모유를 수유했다. 채플 예배도 함께 드렸다. 간식을 먹기 전에는 잔디에 옹기종기 모여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이 학교 학생과 직원들에게 태씨와 자녀들은 교내 유명인사다.
그녀는 열여덟살 시절에 고향인 몽골 울란바토르에서 예수님을 영접했다. 한국인 목회자에게 복음을 접하고 성경을 선물 받은 게 단초였다. 기도 중에 ‘사회복지를 통해 사용하시리라’는 비전을 품게 됐다. 몽골 보건복지부 장관이 그의 장래 희망이다.
한국유학도 꿈꿨다. 몽골 상공대 회계학과와 울란바토르대 한국어학과를 졸업한 그는 2005년 한국에 건너와 서울여대 대학원 사회사업학과를 수료했다.
“사실은 서울여대 대학원을 졸업하지 못했어요. 졸업시험에 3번이나 떨어졌으니 수료만 한 셈이죠. 앞서 몽골인 유학생 한 명도 졸업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하나님은 저를 좋은 길로 인도하셨어요. 목회자 과정인 장신대 신학대학원에 입학하게 하셨거든요.”
태씨는 원래 불교신자였다. 사춘기 소녀시절 엄마와 사소한 말다툼으로 방문을 세게 닫고 짜증을 냈다. 한 번도 엄마의 말을 거역한 적이 없었던 그는 마음에 큰 상처가 됐다. 평소 습관대로 절로 향했다. 그리고 눈물을 쏟으며 빌었다.
“부처님. 잘못했습니다. 엄마에게 함부로 말하고 행동했던 것 용서해주세요….”
잠시 뒤 별난 광경이 발생했다. 절을 관리하던 승려들이 우는 그녀를 이상하게 보고 빨리 나가라며 쫓아냈다. 외국인 관광객들이 보는데 절에서 그렇게 울면 어떡하냐고 했던 것이다.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는 기분이었다. ‘잘못했다고 회개하는 나를 나가라고 하다니’ ‘부처님이 나를 버렸구나’ 등등의 생각을 했다. 얼마 뒤 ‘내 말을 들어주시는 신을 믿겠다’고 생각했고, 중학교 때 봤던 예수 관련 영화가 떠올랐단다. 그 길로 교회를 찾기 시작했다. 태씨는 이제 서울 성동구 무학교회(김창근 목사) 몽골인 예배를 담당한다. 국내 몽골인 근로자와 가족들을 위해 설교 통역을 하고 직접 말씀도 전하고 있다.
국내거주 몽골인 가정 수가 늘어나고 책임감이 생기면서 신학을 전공하게 된 셈이다. 남편 레제트마 강바타르(36)씨는 이 교회에서 만났다. 서로 몽골 선교에 대한 비전을 공유하다가 2008년 결혼했다.
2005년 한국에 근로자로 왔던 남편은 현재 나사렛대 대학원 재활복지학과 박사과정을 휴학 중이다. 등록금과 아이들 양육비용을 벌기 위해 닥치는 대로 막노동을 전전하고 있다.
“남편은 어머니와 형님이 청각장애인이라 장애인 사역에 관심이 많아요. 몽골에 돌아가 신학교에 갈 예정입니다. 어떨 땐 아이들에게 먹일 게 없어 물로 배를 채우게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 가족과 함께 하시기에 행복하답니다.”
그는 간증할 일이 많다고 했다. 지난해 봄 넷째아이를 임신했을 때다. 살던 집 계약기간이 만료돼 다른 집을 알아봤는데 아이들이 많다는 이유로 거절당하기 일쑤였다. 어렵게 집을 얻었다. 보증금 2000만원에 월세 50만원. 보증금이 많이 부족했다. 아이들과 큐티(Quiet Time·경건의 시간)에서 손을 맞잡고 기도했다. 지인들에게 기도제목을 보내고 돈 좀 빌려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계약을 포기할 무렵, 어느 의사한테 연락이 왔다. 몽골에 의료봉사활동을 자주 다녔던 그는 교회 건축헌금 2000만원을 빌려주겠다고 했다.
“감사드립니다. 지금은 제 사례비 50만원을 매달 그 교회 건축헌금 계좌로 보내면서 갚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어려움을 함께하셨고 또한 이겨낼 수 있도록 인도하고 계십니다. 저희는 라마불교가 강한 몽골에 돌아가 기독교를 전하는 복음 전도자가 될 것입니다.” 인터뷰를 마치면서도 태씨 얼굴은 행복해 보였다.
글·사진=유영대 기자 ydyoo@kmib.co.kr
“라마불교의 나라, 내 고향 몽골에 복음을”
입력 2017-05-23 00:00 수정 2017-05-23 1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