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美 고교 개설 과목 220개 VS 국내 65개 ‘천양지차’

입력 2017-05-22 05:01

문재인 대통령의 핵심 교육 공약인 고교학점제가 도입되면 고교 현장과 대학 입시는 근본적인 변화가 불가피해진다. 고교학점제는 마치 대학 교양과목을 선택하는 것처럼 고교에서도 수업을 ‘쇼핑’하듯 골라 듣는 방식이다. 문·이과로 구분된 코스를 밟고 대입을 치르는 현재 방식과 차이가 크다.

고교학점제가 정착된 고교의 모습은 어떨까. 교육부의 한 간부가 미국 현장에서 1년여간(2010년) 분석한 코네티컷주 트럼불 교육청의 트럼불 고교(Trumbull High School) 사례를 소개한다. 당시 행정자치부에 제출된 국외 연수 보고서를 보면 고교학점제가 우리 고교 현실과 차이가 커 녹록지 않은 과제라는 점이 드러난다.

개설된 과목 220개 vs 65개

고교학점제는 막대한 인적 물적 지원이 뒷받침돼야 한다. 분석 당시 트럼불 고교에 개설된 과목은 모두 220개였다. 외국어가 38개로 가장 많고 영어 34개, 사회 30개, 수학 25개, 음악 17개 순이다. 예컨대 ‘전쟁과 평화 시기의 예술사’ 수업처럼 사회 교과 내에서도 쪼개져 있다. 각 과목은 모두 선택과목이며 한 수업에 28명까지 이수 가능하다.

우리 고교는 일반고 기준으로 약 65개 수업이 개설돼 있다. 고교 1학년까지 문·이과 공통 과목을 배우고 고교 2학년부터 선택 과목을 듣는 ‘2015개정 교육과정’이 내년 도입되면 102개 과목까지 허용된다. 미국 사례는 실제 개설된 과목이 220개이고 우리는 102개까지 허용한다는 말이어서 차이가 크다. 도시와 농어촌 지역 학교들의 여건이 천차만별이어서 실제로 학생들에게 균일한 선택권이 보장될지도 미지수다.

인적 물적 인프라 차이도 뚜렷하다. 트럼블 고교 학생 수는 2094명이다. 수업 가능한 교실은 120∼130개다. 교사가 129명, 특수교사 14명, 교장 교감 등 행정 인력 12명이다. 상담사 사회복지사 심리상담사 등이 20명, 간호사 3명, 기타 지원인력 70명으로 구성돼 있다.

수준별 수업, 대입에 양날의 칼

트럼블 고교 수학 교육과정을 보면 철저하게 수준별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표 참조). 기초 코스를 밟던 학생이 중급 수준으로 올라가려면 교사의 승인이 필요하다. 우리 고교처럼 같은 수준의 수업을 듣고 동일한 기준으로 평가받는 방식이 아니다. 고교학점제에서 동일한 기준으로 수업과 평가를 진행하면 낙제생이 생기고 고교를 졸업하지 못하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다. 각자 능력에 따른 선택이란 장점도 있지만 한번 출발이 늦으면 고급 과정을 이수할 기회조차 갖기 어려운 시스템이다. 어떤 수업을 이수했는지는 대입과 직결된다. 고급 과정이나 AP(대학과목 선이수) 과정은 내신 성적에 가산점이 부여된다.

또한 절대평가로 점수를 받는다. 성적 부풀리기는 고교와 대학의 신뢰관계가 형성돼 있어 자제되는 분위기다. 성적 부풀리기 여부는 고교의 명성뿐 아니라 교사의 평판도 좌우하기 때문이다. 후한 점수를 남발하면 다음 입시에서 불이익이 돌아온다. 오랜 기간 대학과 고교 사이에 형성된 ‘신뢰 자산’이다.

이도경 기자 yid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