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현(40·여, 가명)씨는 최근 A대학병원에서 신체감정을 받았다. 교통사고 피해자인 김씨는 소송 과정에서 법원의 신체감정을 받아들였지만 정작 감정을 받기까지는 3년이 걸렸다. 비용만 수백만원에 달했다. 승소를 하게 되면 보상받을 수 있긴 하지만 당장 적지 않은 금액을 지불해야하는 탓에 부담이 컸다.
문제는 신체감정 이후 불거졌다. 되레 수면 장애와 우울증 등이 악화됐다. “외부와 단절된 채 2주 동안 폐쇄병동에 갇혀 있었다. 악몽 같았다. 중증 환자들 틈바구니에 있다보면 악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지 않나. 극한의 환경에 몰아놓고 아픈지 안 아픈지를 관찰하는 것 같았다. 결국 불안과 불면증, 우울증은 더 심해졌다. 사고 피해자 중 상당수는 환자다. 현재 법원의 신체감정절차에서 ‘환자’는 실종된 것 같다.”
신체감정의 현실적인 제도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신체감정은 감정의 여러 분야 중 하나로 법원이 교통사고와 산업재해 등으로 인한 손해배상청구사건에서 ▶피해자의 사인 ▶상해의 부위와 정도 ▶노동능력상실 정도 ▶향후치료비 및 소요일수 ▶개호의 필요성 및 정도 ▶의료비보조의 필요성 ▶기대여명의 단축 여부 등에 관해 해당 과목 의사에게 의견을 보고하도록 한 증거조사를 말한다. 신체감정은 지난 1979년 대법원이 신체감정에 따른 재판 예규를 지정한 이래, 1997년과 2008년, 2017년 예규 개정을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김씨를 비롯해 기자가 만난 다수의 소송 당사자들은 신체감정에 소요되는 시간과 비용 부담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일부는 “비용 부담이 커 결국 (신체감정을) 포기했다”고 말했다. 그로 인한 불이익은 오롯이 소송 당사자가 감당해야 한다. 돈은 감정 자체를 포기하게끔 만드는 주된 요인이다. 산재 등 열악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경우 비용 부담으로 더 큰 어려움을 겪는다. 민사소송에 나섰던 김지현씨는 “A병원에서 신체감정 비용으로 700만원을 청구했다. 전부 검사 비용이었다. B병원에 가면 1000만원이 넘는다고 하더라. 비용에 대한 어떠한 예측을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라고 호소했다. 이에 대해 보건의료단체연합 전진한 정책부장은 “감정의는 객관적 사실을 도출하라는 법원 요구를 받기 때문에 지나칠 정도로 검사를 할 수 밖에 없다. 이 때문에 비용은 천정부지로 오른다. 과잉진료를 한다며 병원과 의사를 책망하는 환자를 보면 안타깝지만 감정의도 어쩔 도리가 없다”고 문제점을 짚었다.
법이 정한 신체감정절차는 ‘감정일시의 지정’, ‘감정’, ‘감정소요실비 정산’, ‘소결’, ‘감정결과의 회신’ 순으로 진행된다. 전 과정에 걸리는 시간을 정확히 알 수 없다. 당장 감정 신청 이후 촉탁기관 지정까지 소요되는 시간부터 제각각이다. 법원에 등록된 신체감정촉탁기관을 무작위 선택해 병원을 지정하는 단순한 과정에도 적잖은 시간이 걸린다. 문제는 그 이후다. 병원이 내부 사정 등으로 감정을 거절하면 법원도 이를 강제할 방법이 없다. 다시 타 의료기관을 지정하기까지 또 상당한 시간이 지체된다.
현재 민사소송을 진행 중이라는 한 법조계 인사는 “신체감정 포기 및 반려자에 대한 집계가 제때 이뤄지지 않아 병원 지정이 번복되는 경우도 많다. 운 좋게 병원이 정해져도 다시 반려되는 경우가 다반사”라고 말했다.
병원이 지정돼도 넘어야 할 산은 많다. 감정의와 일정 조율을 하면 실제 신체감정은 2∼3개월 후에 이뤄진다. 감정이 끝나도 최종 결과를 얻는데 3∼4개월이 걸린다. 이론상으론 신체감정이 완료되기까지 최소 6개월이 걸리지만, 앞서 김씨의 경우처럼 수년이 걸리는 경우가 대다수다. 김씨는 “법원이 신체감정촉탁기관을 지정해도 병원이 꺼리는 경우가 많다. 감정할 시간이 없고 의료진도 부족하다는 게 이유”라고 토로했다.
지난 2012년 발표된 의료법학 논문 ‘의료기관 내부의 신체감정절차와 향후치료비 산정에 대한 문제점의 고찰(강요한 외)’에 따르면 신체감정의 절차적 안정성과 예측가능성은 필수불가결한 요소임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논문에서는 “소송절차에 따라 진행하는 감정에 있어서 최소한의 절차적인 안정성과 예측가능성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현재 의료기관에서 이런 부분에 대한 필요성의 인식이 낮은 것이 현실이다. 감정에 대한 적절한 절차의 안정성 확보는 물론이고 예측가능하며 합리적인 감정을 위해 대법원과 대한병원협회가 합리적인 교육프로그램을 개발해 운영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밝히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대법원은 대한변호사협회(대한변협)와 함께 의료감정 개정을 논의해 예규를 개정했다. 대법원 공보관 측은 “신체감정료는 40만원, 진료기록감정료 60만원으로 각각 100% 인상하고, 재판장이 사정을 감안해 감정료를 인상할 수 있도록 관련 예규를 개정했다”고 밝혔다. 이러한 ‘감정인 등 선정과 감정료 산정기준 등에 관한 예규’는 올해 5월1일 이후 감정이 채택된 사건부터 적용되고 있다. 사실 의료감정료 인상안은 이미 지난해 대법원과 대한변협의 상설 협의체인 ‘재판제도 개선협의회’에서 예고된 바 있다. ‘2016년 7월4일자 합의문 및 향후 추진 계획’에서 감정료 인상안은 이미 합의가 끝났다. 당시 회의에 참가한 한 법조인은 “병원에서 신체감정이 이뤄지면 감정의에게 돌아가는 감정료는 20만원 선이다. 적절한 감정료가 지급돼야 감정의가 제대로 활동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의사가 감정을 꺼리면 방법이 없다. 신체감정촉탁기관 지정을 위해 4∼5개 병원을 거치는 동안 재판은 계속 지연된다. 원고 입장에서 상당한 손해가 아닌가”라고 지적했다.
신체감정촉탁기관이 많아지면 병원 지정에 소요되는 시간을 줄일 수는 있다. 이에 대해 대한의사협회는 현재 대학병원의 신체감정 참여율은 결코 낮지 않다고 주장한다. 의료계 관계자는 “대학병원에서 결론이 신속하게 나오지 않는다는 반응을 청취한 바 없다”고 밝혔다. 주장대로라면 병원은 신속하게 감정을 했지만 기타 과정에서 지체됐다는 이야기가 된다. 의료기관과 법원의 상황 인식이 다르다는 말이다.
신체감정과 관련 법원과 병원 입장이 미묘하게 엇갈리는 가운데, 신체감정의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주장도 있다. 전진한 정책부장은 “신체감정 예규 개정 전제부터 문제”라고 꼽았다. 의료감정료를 높여 촉탁기관 확보를 독려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궁여지책’이라는 것이다. 전 부장은 “신체감정은 불필요한 사회적 비용을 증가시킨다. 신체감정까지 가기 전에 피해자 중심주의가 무엇인지 고려해야한다”며 신체감정이 소모적인 절차라고 지적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법조인도 “주치의가 환자 상태를 가장 잘 파악하고 있다는 것은 소송에 참여한 이들 모두가 주지하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신체감정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법원 눈치를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또 다른 법조인도 “한국에서 법은 상식이나 현실 위에 군림한다. 재판부는 탈 많은 신체감정결과만 인정한다”고 꼬집었다.
앞서 어려움을 호소했던 김지현씨는 현재도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김씨는 “과연 환자의 고통에 대해 법원이 고민을 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시간이 지연될수록 인생이 파괴되는 느낌마저 든다. 법원이 안일하게 대처하는 것 같다”고 강조했다.
피해자 중심의 법원과 재판은 법정 드라마 속에서만 가능한 것일까? 개정된 신체감정이 과연 피해자의 입장을 얼마나 반영했는지 법원과 의료기관 모두 고민해야 한다는 목소리에 귀를 더 귀울여야 할 때다.
김양균 기자 angel@kukinews.com
시간·돈 빼앗는 신체 감정… 법과 의료는 누구편?
입력 2017-05-21 19: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