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전 대통령은 민주당 대선 후보로 나섰던 제14대 대선 다음 날인 1992년 12월 19일 패배가 확정되자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이회창 한나라당 대선 후보도 제16대 대선 다음 날인 2002년 12월 20일 패배를 인정하면서 정계 은퇴를 발표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들 모두 정계로 다시 돌아왔지만 대선에서 패배한 후보들이 정치권을 당분간 떠나있는 것은 불문율처럼 받아들여졌다. 정계 은퇴를 선언하지는 않아도 현실 정치와 거리를 두고 오랜 기간 침묵을 지키며 자숙하는 것이 대선 패배자들의 숙명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이번 대선에서 패배한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후보와 안철수 전 국민의당 후보의 행보는 과거와 사뭇 다르다. 대선 패배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았는데 거침없는 발언을 쏟아내며 현실 정치에 개입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후보들의 캐릭터와 구심점이 없는 한국당과 국민의당 처지가 이런 상황을 낳은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또 김영삼 김대중 박근혜 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의 사례처럼 대선 재수가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지면서 후보들이 당내 영향력을 잃지 않기 위해 빨리 움직이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미국에 체류 중인 홍 전 후보는 17일에도 페이스북 정치를 이어갔다. 그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박근혜 팔아 국회의원 하다가, 박근혜 탄핵 때는 바퀴벌레처럼 숨어있었고, 박근혜 감옥 가고 난 뒤 슬금슬금 기어 나와 당권이나 차지해 보려고 설치기 시작하는 사람들 참 가증스럽다”고 친박(친박근혜)계를 맹비난했다. 또 정우택 원내대표(당대표 권한대행)를 겨냥해 한국당만 대선 이후 당 지도부 사퇴가 이뤄지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친박계는 반발했다. 홍문종 의원은 중진의원 간담회에서 “홍 전 후보가 페이스북에 ‘바퀴벌레’라고 썼다고 하는데 이게 제정신이냐. 낮술을 드셨냐”며 맞받아쳤다.
홍 전 후보는 차기 당권 도전 의지를 숨기지 않고 있다. 재기를 모색하는 친박계와 당 지도부를 이끄는 정 원내대표를 싸잡아 비난한 것은 이들 모두 차기 당권의 잠재적 경쟁자들이기 때문이다. 홍 전 후보가 내심 당대표 추대를 원한다는 얘기도 흘러나온다. 한두 달 체류 예정으로 미국으로 떠났던 홍 전 후보가 조기 귀국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안 전 후보는 지난 14일 자신의 싱크탱크 역할을 한 ‘전문가 광장’ 관계자들과의 만찬 회동에서 “5년 뒤 제대로 시대정신을 구현하는 사람으로 인정받아 50% 이상 지지를 받을 수 있도록 혼신의 힘을 다하겠다”고 말하며 대선 재수 의사를 내비쳤다.
안 전 후보는 18일 광주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열리는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한 뒤 지지자들과 함께 비공개로 오·만찬을 가질 예정이다. 이후엔 전국을 돌며 대선 과정에서 도움을 준 지지자들에게 감사 인사를 하는 일정을 계획 중이다.
안 전 후보 측에서는 대선 패배 이후 자숙하지 못하는 것처럼 비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는 분위기도 읽힌다. 국민의당 관계자는 “불필요한 오해를 낳을 수 있기 때문에 5·18민주화운동 기념식 이후의 안 전 후보 일정은 비공개로 진행키로 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이정희 한국외대 정외과 교수는 “후보들의 캐릭터가 근본적인 이유”라고 진단했다. 그는 “홍 전 후보는 원래 하고 싶은 얘기를 해야만 하는 스타일이고, 안 전 후보는 대선 기간 ‘강단이 없다’는 비판이 있었다”며 “이 때문에 주저하기보다 자기 입장을 분명히 밝히면서 정치를 계속하려는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가상준 단국대 정외과 교수는 “대선에서 지고 5년 동안 기다렸다가 다시 도전하는 게 정치문화처럼 돼 버린 것 같다”면서 “한국당은 친박계 문제가 있고, 국민의당은 안 전 후보가 없으면 구심점이 없기 때문에 당내 영향력을 잃지 않기 위해 홍 전 후보와 안 전 후보가 일찍 움직이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하윤해 김경택 권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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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재수시대’… 패한 후보들, 공백 없이 정치행보
입력 2017-05-18 0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