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지면 바스러질 것만 같다. 두 살 아이의 몸무게는 고작 10kg. 아이를 살리고자 심혈을 기울였지만 결국 사망하고 말았다. 에볼라 때문이었다. 이 죽음은 서아프리카 시에라리온에 파견돼 구호활동을 벌이던 정상훈(46·에볼라 구호 의사·노동당 서울시당 위원장·사진) 위원장에게 지울 수 없는 의문을 남겼다. 아이가 무슨 죄가 있길래. 이유는 하나다. 시에라리온에서 태어난 죄.
현장에는 구구절절한 환자의 사연이 많다. 한 결핵 환자는 치료를 거부했다. 감염 사실이 알려지면 집에서 쫓겨난다고 했다. 자식과의 생이별이 두려워 치료를 포기한 것이다. 다른 환자는 일자리를 구해달라고 했다. 환자의 양친도 에볼라로 죽었다. 정 위원장은 그의 생존 여부를 장담키 어렵다고 말했다.
살린 사람보다 살리지 못한 환자가 더 많았다. 고민은 죄책감으로, 다시 고통이 돼 가슴을 후벼 팠다. 구호 현장에서의 깨달음은 본질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결심으로 바뀌었다. 정치로의 투신을 결정한 이유다. 그러나 한국의 현실도 녹록치 않다. 생존권을 요구하며 단식농성을 이어가는 사람들에게서 그는 시에라리온의 아이를 떠올린다. ‘지는 싸움을 하는 이들에게 어떤 도움을 주고 있는가.’ 고민은 현재진행형이다.
지난 16일 정상훈 위원장을 만나기 전 민주콩고공화국(민주콩고)에서 비보가 날아들었다. 에볼라가 재발, 3명이 사망했던 것이다. 지난 2014년에도 에볼라로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당시 기니, 시에라리온, 라이베리아, 말리, 나이지리아 등은 의료진이 부족해 사상자가 극심했다. 이 때문에 한국의 에볼라 공포는 상상을 초월한다. 2014년 에볼라 창궐 소식이 전해지자 흑인들에 대한 무차별 차별이 벌어지는가 하면, 인천-케냐 나이로비를 잇는 직항 노선도 하루아침에 끊겼다. 주한케냐대사관의 모하메드 겔로 대사는 “케냐는 동아프리카에 속한다. 서아프리카까지의 거리는 유럽보다 멀다”며 유감을 표했다. 무지가 낳은 어처구니없는 결과였다.
정상훈 위원장은 “방역 당국의 에볼라를 대하는 태도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정보 전달 없이 에볼라의 국내 유입 봉쇄에만 관심을 쏟는다. 바이러스 차단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 과정에서 에볼라는 아프리카에 대한 편견과 결부돼 사실을 왜곡시킨다. ‘빈민국에서 유래된 전염병’이라는 인식은 무지를 조장하는 한편 두려움의 대상을 타자화하는 위험한 발상이다.”
최근 질병관리본부는 에볼라 대책을 발표했지만 대중의 신뢰는 높지 않아 보인다. 정 위원장은 “메르스(MERS) 당시 보건당국이 보인 무능과 비밀주의가 원인”이라고 말했다. “그 당시 정부는 무방비 상태였다. 감염병 대응 매뉴얼이 부재했다.” 초기 감염 정보를 숨긴 게 감염의 확산을 부채질했다는 해석이다. 현재도 메르스 백서에는 정보공개 지연 이유에 대해 명확한 이유가 나와 있질 않다. 정 위원장은 새로운 방역 시스템 설계를 위해서라도 메르스 사태의 전말을 밝혀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행 의료 제도의 한계도 존재한다. 방역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이유는 컨트롤 타워로써의 공공 의료기관이 부족한 탓이 크다. “공중보건과 민간 의료기관의 영리행위는 충돌할 수 있다. 공공 의료기관의 확충이 시급하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없는 걸까? 정 위원장은 “바이러스의 국내 유입 차단만큼 창궐 지역에 대한 조사와 치료가 중요하다. 현지의 낙후된 위생 환경 개선시켜야 한다”고 밝혔다. ‘발본색원’이야 말로 에볼라 해결을 위한 자세라는 이야기다.
정 위원장은 ‘왜 에볼라 현장에 갔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시에라리온 파견 당시 난 700번째 의료진이었다. 700번째로 간 것이 대단한 희생을 한 것처럼 비쳐지는 게 부끄러웠다.” 현장에서 늘어나는 감염자들을 전부 감당하기란 역부족이었다. 의료진이 해결할 수 없는 사태가 진행됐던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당시의 무력감과 책임감은 아직 생생하다. “되풀이 되는 비극을 막으려면 세상이 바뀌어야 한다.” 에볼라가 그의 가슴에 새긴 불길은 오늘도 그를 움직이는 원동력이다. 김양균 기자
에볼라 현지 구호활동 했던 의사 정상훈 “정보전달 없이 차단에만 주력…비밀주의 방역책 신뢰 못 얻어”
입력 2017-05-21 1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