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리더십 모델로 꼽은 세종대왕. 세종이 궁금해졌다. 왜 존경받는지, 어떻게 성군이 됐는지. 그래서 세종실록 강의서 ‘세종처럼’을 읽어봤다. 세종은 카리스마 넘치는 군주는 아니었다. 목표를 정하고 결단을 내리는 순간까지 끊임없이 토론했다. 특징적인 것은 토론 과정에서 생각을 바꾼 반대자로 하여금 그 일을 책임지고 추진하게 했다는 점이다. 세제개혁 때 황희, 여진 정벌 때 최윤덕이 그랬다. 토론을 통해 다양한 변수를 점검하고, 목표를 명확히 공유하면서 함께 나아가는 게 세종 리더십의 요체였다. 자칫 집단사고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 허조 같은 ‘까칠한’ 인사를 곁에 뒀다.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민족의 성군’ 반열에 오른 이유로는 좀 부족해 보였다. 신권이 강했던 조선 초기엔 신하들을 설득시키는 일이 왕이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할 행동준칙이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다 이 대목을 접하고 무릎을 쳤다. 식위민천(食爲民天).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요, 밥은 백성의 하늘이다’는 이 말은 세종실록에 8번이나 나온다. 세종정치의 핵심적 언명인 셈이다. 책을 덮으며 소통 리더십을 바탕으로 한 통치행위가 일관되게 민생을 지향한 게 세종을 성군으로 만들었다고 나름 결론을 내렸다.
문 대통령의 취임 후 행보가 시원시원하다. ‘고구마’라는 후보 시절의 별명이 무색한 ‘사이다’ 행보다. ‘이게 나라냐’며 광장으로 쏟아져 나왔던 사람들도 “뭔가 바뀌고 있다”며 기대감을 드러낸다. 하지만 불공정 해소라는 명분에만 집착하다가는 실패할 수 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하나회 척결’ ‘금융실명제 도입’ 등 적폐 청산 부문에선 빛나는 성과를 냈지만 역대 대통령 선호도 조사에선 항상 최하위권을 맴돈다. 재임 당시 터졌던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로 민생이 도탄에 빠졌기 때문이다. 정권을 조기에 교체시킨 촛불혁명의 이면에도 ‘밥 문제’가 있다는 분석도 많다. 불안정한 고용, 허술한 사회 안전망, 심화되는 임금 격차로 코너에 몰린 시민들의 불안감과 분노가 국정농단 사태를 계기로 폭발했다는 것이다.
문 대통령이 취임 후 단행한 첫 행정조치는 일자리 문제였다. 후보일 때는 명분으로 선택을 받았더라도 국가 지도자가 된 이상 철저히 민생에 초점을 맞추겠다는 의지로 보여 반가웠다. 아쉬운 부분도 있다. 주거정책이다. 일자리 못지않게 심각한 게 주거 문제다. 많은 청년들이 집 얻을 돈을 못 구해 결혼할 엄두를 못 내고 있고, 무리해서 집을 구한 중장년층은 부채에 짓눌려 지갑을 열지 못하고 있다. 주거 문제만 해결해도 저출산, 가계부채, 소비부진 등 구조화된 우리 사회 고질병들이 상당 부분 해소될 수 있다. 그러나 도심 재생과 공공임대주택 공급 확대로 요약되는 문 대통령의 주거 관련 공약으로는 이들 문제 해결이 쉽지 않아 보인다.
싱크탱크 ‘여시재’의 이헌재 이사장(전 경제부총리)과 이원재 기획이사가 국가의 역할에 대해 나눈 대담집에 실린 제안도 고려해볼 만하다. 국채 발행 등을 통해 마련한 재원으로 주택을 매입해 보증금 없이 시장가 대비 절반 가격으로 임대하는 정책이다. 주택보급률이 100%를 넘어섰고, 인구가 줄면서 빈집이 넘쳐나는데 굳이 임대주택을 새로 지을 필요가 없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임대주택에 산다는 사회적 편견과 차별이라는 부작용도 해소될 수 있다. 개인부채를 국가부채로 이전시킬 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바꿔 생각해보면 국가가 안정적인 임대수익을 올릴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500조원의 국민 노후자금을 굴리는 국민연금이 투자할 데가 없어 해외 건물 임대업까지 뛰어드는데 이런 투자처를 외면할 이유도 없다.
한장희 경제부장 jhhan@kmib.co.kr
[데스크시각-한장희] 밥은 백성의 하늘이다
입력 2017-05-17 17: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