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정치 격언 가운데 ‘보수는 부패로 망하고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말이 있다. 이러한 정치 격언을 뒤로하고, 지난 대선에서 한국 보수는 헌정사상 최초로 분열된 대오로 선거에 임했고 그 결과는 참담한 패배였다. 이것을 두고 보수 정당 안팎에선 박근혜-최순실의 국정농단이 결정적 패인이라고 지목하고 있다. 과연 이렇게 정리하고 넘어갈 수 있을 만큼 간단한 문제일까. 헌정사상 유례가 없었던 보수의 분열, 생각만 해도 끔찍한 국정농단의 근본적인 원인을 짚어봐야 한다는 것이다.
거침없는 입에 의존해 전통 보수를 결집하는 데만 그쳤던 홍준표의 자유한국당이나 젊은 보수의 관심을 이끌어내는 데만 성공했던 유승민의 바른정당이나 실패한 것은 매한가지였다. 왜냐하면 선거에서 정당의 목표는 정권 획득이기 때문이다. 대선 과정에서 ‘보수 세력을 완전히 궤멸시켜야 한다’는 독설도 나오기는 했지만, 새롭게 집권한 진보 세력에게 건강한 긴장감을 불어넣기 위해서도 보수 재건은 필수적이다. 진보 여당에 생산적인 국정 대안을 제시하면서 정책 경쟁을 벌여나갈 보수 야당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쯤에선 총체적 위기에 빠진 보수를 극적으로 복원시킬 여지를 탐색해야만 한다. 역사를 거스르는 수구 반동 세력과의 완전한 결별 후에만 가능한 시나리오이기는 하지만, 우선 공동체주의를 확립해야 한다. ‘오두막이 행복하지 않으면 궁전도 안전하지 않다’고 하면서, ‘늙고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의 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으면 선거에서 절대로 이길 수 없다’는 영국 보수당 당수 벤저민 디즈레일리의 주장을 철저하게 음미해야 한다. 영국에선 그의 이러한 철학이 ‘하나의 국민’이라는 전통으로 이어져 초기 복지사회의 기틀이 되었다.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과감한 개혁이다. 영국의 보수당은 ‘보수’라고 하는 진부한 이름으로도 300년 넘게 정치적 생명력을 유지해 오고 있다. 그 비결은 변화였다. 한국에서는 박정희 시대 유산이라고 할 수 있는 국가주의 발전 모델, 강한 리더십, 반공주의 등이 전통 보수의 기초였다. 이것들은 모두 과거지향적인 것으로 시대에 뒤떨어진 것들이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한국 보수는 지난 10년간 산업화와 민주화를 달성한 이후의 변화된 시대에 걸맞은 보수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보여주는 데 실패했다.
마지막으로 한국 보수는 자신들이 목숨을 걸고 싸울 이념과 사상을 다시 세워야 한다. 보수라는 구호만을 내걸고 실상은 수구에 가까운 보수 패권 세력은 역사의 뒷전으로 물러서는 것이 순리다. 그동안 젊은이들에게 보수의 이미지에 대해 물으면 ‘존경할 인물이 없다’ ‘촌스럽다’였다. 그러나 이젠 여기에 ‘능력도 없다’ ‘부패했다’는 라벨까지 덧붙여졌다. 이런 상황에서 투표소에서 보수를 선택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난센스다. 구조적으로 보수가 우위를 점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전통 보수와 젊은 보수의 자발적 동의를 동시에 이끌어내서 이들을 융합시킬 수 있는 이념과 사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보수는 광복 후 좌우 이념 대립 속에서 대한민국을 건국했고, 6·25전쟁 이후 가난을 딛고 선 산업화의 주역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개혁을 거부하고 변화에 둔감했던 지금의 보수는 삭풍이 불어오는 황야에 홀로 서 있다. 그런데도 패권 집단으로 변해버린 주류 보수는 각양각색의 기득권으로 자신들만의 성을 쌓고 문을 닫아버렸다. 이런 자세로는 보수의 위기를 넘어 한국의 위기를 탈출할 수 있는 출구를 절대로 마련할 수 없다. 지금의 보수가 이처럼 궁박한 처지에 내몰린 것은 자초한 것이라는 통절한 반성을 거듭해서 요구하고 있다.
윤순갑 경북대 정치외교학 교수
[시사풍향계-윤순갑] 한국 보수가 가야 할 길
입력 2017-05-17 17: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