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노트] 과거의 상처 말하기

입력 2017-05-12 17:40
르네 마그리트의 ‘기억’

“마음의 상처를 꺼내고 싶지 않아요. 가슴에 묻어두고 그냥 참고 살래요.” 상담을 하러 와서도 선뜻 자기 사연을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억눌린 기억과 감정이 자신을 더 아프게 만드는데도 마음속에 묻어두려고만 한다. 과거가 현재를 발목 잡고, 미래를 절망적이라고 느끼게 하는데도 억누르려고만 한다.

왜 이러는지, 이해할 수 있다. 고통을 겪은 당사자 입장에서는 과거를 이야기하는 건 또 다시 고통을 느껴야 하는 일이니, 입 다물고 사는 편이 훨씬 낫다고 여길 수밖에 없다. 과거를 다시 이야기한들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현재가 뒤집히는 것도 아니니 말할 필요가 없다고 느끼는 것도 당연하다.

과거를 묻어두겠다는 건, 더러운 이불을 세탁도 하지 않고 이불장에 구겨 넣어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이렇게 살면 시간이 흐를수록 냄새는 심해지고 이불은 더 더러워진다. 제대로 정리하지 않고 우겨넣었으니 틈만 나면 이불장 밖으로 쏟아져 내린다. 그때마다 깜짝 깜짝 놀란다. 양손으로 이불장 문을 꼭 붙들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더러운 이불이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으니까. 이불장 문을 닫고 있느라 힘을 잔뜩 쓰면서 다른 일은 할 수조차 없다. 과거의 아픈 기억과 감정을 무조건 묻어두고 살자는 건, 딱 이런 모습이다.

과거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더러워진 이불을 깨끗이 세탁해 차곡차곡 개어 이불장에 다시 넣는 일이다. 이렇게 하면 냄새 날 일도, 이불이 쏟아질까 노심초사하며 문을 닫고 있지 않아도 된다. 무엇보다 미래를 향해 움직여 나갈 수 있게 된다.

이미 벌어진 인생의 수많은 사건을 없었던 것으로 만들 수는 없다. 과거를 없었던 셈 치고 잊고 사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억누르고 없는 셈 치겠다고 해서는 안 된다. 아픈 과거를 이야기하는 건 과거를 잊어버리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고통스러운 기억이 이야기가 되어 세상 밖으로 나가고, 새로운 이야기가 돼 마음속에 다시 들어왔을 때 “과거에서 벗어났다”고 말할 수 있다. 과거를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고, 그 속에서 의미와 교훈을 찾아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비로소 “치유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김병수(정신과 전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