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고승욱] 잿더미 속에서 되살아나기

입력 2017-05-11 19:13

2011년 12월 7일 서울 마포아트센터에서는 토크콘서트 ‘The 위대한 검찰!’이 열렸다. 검찰개혁을 주제로 한 첫 토크콘서트였다. 당시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김인회 인하대 교수와 함께 쓴 책 ‘검찰을 생각하다’의 출판을 즈음해 기획된 행사였다.

패널로 무대에 선 문 이사장은 2003년 노무현 대통령과 검사와의 대화를 언급하며 검찰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검찰은 경찰을 산하기관처럼 부린다. 통제와 견제를 받지 않는다. 책임을 물을 방법도 없어 권한을 남용한다. 절대권력은 절대 부패하기 마련이다. 검찰은 정치권력과 야합하고 유착한다. 권력의 비리에는 눈을 감고 반대파는 표적으로 삼는다”고 말했다. “검찰을 개혁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민주화를 이루기 어렵다”고도 했다.

사회자는 신임 청와대 민정수석인 조국 서울대 교수였다. 그는 “검사는 스스로 칼을 휘두르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칼의 속도와 방향, 강도를 잘못 조절하면 엄한 사람을 죽인다. 칼을 잘못 쓰는 검사에게서는 칼을 뺏어야 한다. 검사가 칼을 독점하고 있다. 수사권과 기소권이라는 쌍칼을 들고 흔든다”고 말했다.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표현은 누구보다 강했다.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의 청와대 인사 발표를 보며 6년 전 토크콘서트가 생각났다. 많은 사람이 “드디어 시작하는구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실 문재인 대통령 공약집 ‘나라를 나라답게’에는 개혁이 필요한 권력기관으로 검찰이 제일 먼저 나온다.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 신설, 수사권·기소권 분리를 골자로 하는 검·경 수사권 조정, 검찰총장후보위원회 구성은 선거운동 중 수없이 논의된 사안이다. 하지만 그다지 실감나지 않았다. 역대 정권이 늘 그랬기에 면역력이 생긴 탓이다. 그런데 조 수석 임명으로 분위기가 조금 달라졌다. 임 실장은 임명 배경으로 “권력기관 개혁 의지를 담았다”고 했다. 조 수석은 “검찰이 막강한 권한을 엄정하게 사용했는지 의문”이라는 말로 인사를 대신했다. 내년 지방선거 전에 끝낸다는 원론적이지만 구체적인 일정도 제시했다.

개인적으로 속마음을 말하라면 아직도 미심쩍다. 시늉만 하다가 끝내는 건 아닌지, 조직 생리를 제대로 모르는 ‘교수님’이 잘 할 수 있을지, 조직적 반발을 어떻게 극복할지, 여소야대 상황에서 국회라는 높은 벽을 어떻게 뛰어넘을지 의문이다. 하지만 지금 국면에서 검찰개혁 실패는 문재인정권의 실패를 의미한다. 문 대통령은 취임선서를 하기 전부터 야당 당사를 방문하며 협치에 시동을 걸었지만 기본적으로 적폐 청산을 앞세워 당선됐다. 조 수석의 임명은 적폐 청산의 첫걸음은 검찰개혁이라고 선언한 것과 마찬가지다.

지구에서 가장 큰 생명체는 고래가 아니다. 고래 중 가장 큰 흰수염고래보다 몸무게가 13배 많이 나가는 자이언트 세콰이어다. 이렇게 거대한 나무도 산불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두툼한 껍질로 몸을 보호한다 해도 속절없이 쓰러진다. 하지만 자이언트 세콰이어는 산불을 이용해 되살아난다. 거대한 솔방울처럼 생긴 열매는 뜨거운 불 속에서만 입을 벌린다. 안에 있던 씨앗은 불기운이 만든 상승기류를 타고 날아간다. 그리고는 잿더미가 된 땅에 다시 떨어져 거침없이 자란다.

그동안 검찰은 사회의 거악을 제거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국민이 대검 중수부에 박수를 치며 환호했던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검찰이 청산의 대상이 됐다. 왜 그런지, 갈 곳이 어디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다. 힘들고 어렵겠지만 국민과 함께 뚜벅뚜벅 걸어가는 검찰의 모습을 기대한다.

고승욱 논설위원 swk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