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d 트렌드] 많이 아팠지! ‘착한 패션’ 지구를 보듬다

입력 2017-05-12 05:00 수정 2017-05-12 22:06
패션산업이 유발하는 환경오염을 고발한 다큐멘터리 영화 ‘리버블루’ 포스터.
지난해 5월 뉴욕의 패션쇼에서 독특한 디자인의 드레스를 입고 있는 배우 엠마 왓슨. 플라스틱 병에서 섬유를 추출해 만든 ‘재활용’ 옷이었다. 왼쪽 사진은 최근 공개된 왓슨의 옷장. AP, 코베튀르 캡처
패션 브랜드 H&M이 지난달 출시한 해안 폐기물 재활용 의상들. H&M 제공
사도 사도 부족한 게 옷이다. 계절이 지나 옷장을 열면 지난해 이맘때 뭘 입었는지 의아할 만큼 옷은 늘 부족하다. 그런데 ‘옷을 계속 사도 괜찮은가’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과소비 걱정이 아니라 그 옷이 가져오는 환경오염을 우려한다. 패션을 고심하며 지속 가능성을 생각하는 사람, 우리 주변에 있다.

‘지속 가능한 패션(Sustainable fashion)’은 미래세대, 환경오염을 생각하는 패션을 말한다. 제작 단계부터 다르다. 버려지는 천과 염료를 최대한 줄이는 방식을 고수한다. 소비자가 옷을 입고 버릴 때 분해가 잘돼야 한다. 나아가 세탁, 건조, 다림질이 환경에 줄 부담도 생각해야 할 문제다. 있던 옷을 재활용해 다시 입거나 이를 소재로 다른 옷과 패션 소품을 만드는 ‘업사이클링’도 지속 가능한 패션으로 분류된다.

톱스타의 초라한 옷장이 주는 교훈

영국 출신 배우 엠마 왓슨은 최근 패션지 ‘코베튀르(Coveteur)’에 개인 옷장을 공개했다. 영화 ‘미녀와 야수’로 높은 흥행 성적을 거둔 왓슨은 명실공히 톱스타. 하지만 옷장은 걸맞지 않게 초라했다. 단층 옷장에는 서른 벌 남짓 옷가지가 걸려 있을 뿐이었다.

신념으로 시작한 일이지만 이런 옷장이 장점도 있다고 왓슨은 말했다. “옷이 적다 보니 더 창의적으로 생각하게 된다. 이를 테면 갖고 있는 원피스를 더 좋아 보이게 하려 노력한다.”

지난해 5월 미국 뉴욕에서 유명 패션행사 ‘메트 갈라’가 열렸다. 왓슨은 플라스틱병에서 추출한 섬유로 만든 옷을 입고 레드카펫에 섰다. ‘마리끌레르’ 등 패션지는 “왓슨이 ‘쓰레기’로 만든 의상을 입었다”며 재활용 지퍼와 유기농 면 등을 소개했다. 왓슨도 페이스북에 “쓰레기를 재활용해 옷을 만드는 건 창의성과 과학, 패션의 협업”이라고 적었다.

변모하는 ‘패스트 패션’ 시장

패스트 패션은 지속 가능한 패션의 반대말이다. 다양한 디자인을 싼값에 살 수 있어 소비자에게 편리하지만, 환경을 망치는 원인으로 꼽힌다. 단가를 낮추기 위해 합성섬유를 많이 쓴다. 당연히 천연섬유보다 썩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강박증에라도 걸린 듯 자주 내놓는 신상품은 구매욕을 불러일으킨다. 옷장에 걸린 옷이 많을수록 입을 기회는 줄어든다.

2주마다 ‘신상’이 나오는 세계적 패션 브랜드 H&M이 지속 가능한 패션에 눈을 돌린 것은 반가운 일이다. 이런 대형 업체의 실천은 왓슨이 실천하는 ‘착한 소비’보다 더 큰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H&M 관계자는 11일 “세계에서 지속 가능 업무를 담당하는 H&M 직원이 200명 넘는다”고 했다.

H&M은 2030년까지 전 제품에 재활용이나 지속 가능 소재만 사용하겠다는 목표를 이달 초 밝혔다. 2020년까지는 현재 43%인 ‘지속 가능한 면’ 사용률을 100%로 끌어올린다고 했다. 지난해에는 페트병 1억8000만개 분량의 재활용 폴리에스테르를 제품에 사용했다. 해변에서 수거한 플라스틱에서 뽑아낸 섬유로 만든 옷을 지난달 말 출시하기도 했다.

H&M은 지난달 6일 스웨덴에서 열린 ‘글로벌 체인지 어워드’에서 거름으로 만든 천 개발자 등 지속가능패션 혁신가 5명에게 상금 100만 유로(약 12억4000만원)를 주며 격려했다.

버려진 청바지로 가방 만드는 디자이너

이처럼 세계적 기업의 변화가 지속 가능한 패션의 판도를 바꿔 놓고 있다면 국내 신생 회사의 시도는 ‘누구나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준다. 지난해 설립된 ‘이스트인디고’는 가방, 모자, 소품 등 전 제품에 버려진 청바지와 재생 가죽을 사용한다. 장슬아(31) 함민규(27) 공동 대표는 패션 디자이너로 일하다 만났고, 비슷한 고민을 나누다 이 브랜드를 만들었다.

두 대표는 환경오염을 줄이기 위해 제작 과정의 수고로움을 감내하고 있다. 크기별로 재단된 원단을 쓰면 싸고 구하기도 쉽다. 그러나 이들은 다양한 디자인의 청바지를 수거하고, 색상과 용도에 따라 가공, 분류해 사용한다. 보통 가죽 원단은 주문 하루 뒤면 받을 수 있지만 재생 가죽은 3주가 걸린다.

함 대표는 “버리는 청바지를 가져다 쓰니 원가가 공짜 아니냐고 묻기도 하는데 청바지 해체 작업을 해야 해 오히려 2배 정도 비용이 더 든다”고 했다. 제품 기능을 위해 재단된 원단도 쓰는데, 이때 쪽잎을 사용한 천연 염색을 한다. 화학 염료보다 10배 비싸다. 함 대표는 “국내 한 회사에서 일할 때 원하는 색을 한 번 뽑아낸 뒤 염료가 그대로 버려지는 걸 본 뒤로 내 브랜드가 생기면 그러지 말자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옛것 같은 빈티지 느낌을 살리는 데는 진짜 낡은 옷만 한 게 없다. 디자인이 마음에 들어 산 구매자가 의미 있는 제품임을 알게 됐다고 반응할 때 가장 뿌듯하다는 두 대표는 “더 많은 ‘쓰레기’ 청바지에 새 생명을 불어넣고 싶다”고 했다.

‘쓰레기’ 명품의 성공… 합성섬유의 역습

‘멋있고 예뻐야 한다’는 패션의 제1 조건은 바뀌기 어렵다. ‘개념’만 내세워 사라고 하는 건 강매에 가깝다. 스위스 브랜드 ‘프라이타크’는 환경친화적 가치 말고도 현대적 디자인으로 인정받은 좋은 사례다. 프라이타크는 트럭 덮개, 자전거 튜브, 카시트 벨트를 재활용해 가방을 만든다. 가격은 10만∼60만원 정도로 비싸다. ‘재활용 명품가방’의 대명사인 프라이타크는 이런 가방을 연간 20만개씩 판다.

지난 3월 미국 플로리다대학 연구진이 수질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플로리다의 950개 지역의 물에서 나온 미세플라스틱 중 83%가 합성섬유인 마이크로 파이버였다. 부드럽고 신축성이 좋아 운동복에 많이 사용되는 원료다. 연구진은 의류를 세탁할 때 얇은 실 형태로 흘러나온 것으로 추정했다. 미국 환경매체 에코와치에 따르면 세계 의류의 60%가 마이크로 파이버로 만들어지고, 사용량은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옷을 빨았을 뿐인데 자연을 망치고 결국 건강까지 위협하는 상황에 많은 이가 충격을 받았다.

연구진은 “제품 정보를 자세히 읽고 면이나 리넨, 실크 등 천연섬유로 된 옷을 사 입자”고 제안했다. 지속 가능한 패션을 실천하자는 온라인 서명에는 3만명 가까이 참여했다. 미국 아웃도어업체 파타고니아와 독일 환경단체 구피프렌드는 마이크로 파이버 세탁 때 오염을 막아줄 세탁망을 개발 중이다.

영국 패션디자이너 오솔라 드 카스트로는 캐나다 다큐멘터리 영화 ‘리버블루’(2016)에서 “중국 강을 보면, 그해 패션에서 유행하는 색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영화는 붉은 염료로 점차 물드는 중국의 어느 강을 배경으로 시작된다.

쉽게 사고 버리는 패스트 패션의 성장에 옷은 석유에 필적할 환경파괴 주범이 됐다. 옷을 사기 전 내 옷장에 걸린 옷이 뭔지 떠올리고, 매장에 진열된 옷을 뒤집어 라벨을 한 번 더 살피는 작은 수고가 절실하다.

신은정 기자 se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