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김서정] 룸펠슈틸츠헨

입력 2017-05-11 17:40

‘룸펠슈틸츠헨’이라는 독일 옛이야기가 있다. 발음하다 혀를 깨물 것만 같은 이 단어는 한 난쟁이 이름이다. 이야기는 이렇다. 어떤 아버지가 왕에게 자기 딸이 짚으로 금실을 자을 수 있다고 말한다. 왕은 딸을 짚이 가득한 방에 가둔다. 금실로 바꾸지 못하면 목을 베겠다는 것이다. 울기만 하는 딸 앞에 난쟁이가 나타나 목걸이를 받고 과제를 대신한다. 왕이 또 준 과제에는 반지가 쓰인다. 그리고 세 번째 과제. 이걸 해내면 딸은 왕비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줄 것이 없자 난쟁이는 결혼해서 낳을 첫 아이를 요구하고 딸은 승낙한다. 아이가 태어난 뒤 다시 나타난 난쟁이. 약속을 까맣게 잊고 있던 왕비가 애걸복걸하자 그는 자기 이름을 알아낼 것을 요구한다. 왕비가 보낸 하인은 깊은 숲 속에서 노래하는 난쟁이를 발견한다. ‘내 이름은 룸펠슈틸츠헨이라네!’ 왕비가 이름을 대는 순간 난쟁이는 펄펄 화를 내며 양손으로 자기 왼쪽 발을 잡아 몸을 두 동강 낸 뒤 땅속으로 사라진다.

옛이야기는 흔히 권선징악을 말한다고 여겨지지만, 이 이야기에서는 뭐가 선이고 악인지 어리둥절하다. 거짓말로 딸을 사지에 몰아넣는 아버지, 탐욕스럽고 잔인한 왕, 경솔하고 무책임한 딸. 선보다 악에 가까워 보이는 인간들은 해피엔딩이다. 악당처럼 보이는 난쟁이가 오히려 안쓰럽다. 궁지에 몰린 인간을 도와준 대가가 이거란 말이냐.

여러 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겠지만 내게는 이 인간들이 우리 자신처럼 보인다. 거짓, 탐심 경솔, 무책임, 잔인. 모두 우리 안에 있으면서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을 궁지에 몰아넣는다. 그런데도 아슬아슬하나마 삶은 무사히 영위된다. 룸펠슈틸츠헨이 돕는 거겠지. 그는 치명적인 대가를 치러야 할 순간에 슬쩍 힌트를 흘려 우리를 구해주고 사라진다. 그처럼 자기 존재를 완벽하게, 무시무시하게 매혹적으로 없애버리다니! 위기가 지나고 해피엔딩이 온 것처럼 보일 때 룸펠슈틸츠헨을 기억하자. 이 복잡한 난쟁이 이야기는 언제든 되풀이될 수 있다.

글=김서정(동화작가·평론가), 삽화=공희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