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남도영] 구시대의 막내, 새시대의 맏형

입력 2017-05-10 19:08 수정 2017-05-10 19:41

노무현 대통령 시절 얘기다. 문희상 청와대 비서실장은 사석에서 정치인을 투쟁형과 화합형으로 분류했다.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저돌적으로 싸우는 정치인이 투쟁형이고 대화와 타협, 절충을 시도하는 정치인이 화합형이다. 문희상 실장은 “역대로 늘 대통령이 됐던 사람은 투쟁형 정치인”이라고 했다. 격렬한 대립이 일상화된 한국 정치에서 투쟁형 정치인이 늘 승리했다는 설명이었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모두 투쟁형 대통령이었다. 군인 출신이든, 정치인 출신이든 대부분 권력을 향한 강렬한 욕망을 지녔다. 상대방을 제압하지 않으면 승리하기 힘든 선거 구조 때문이었다. 문 실장은 “나라가 발전하려면 투쟁형보다는 화합형 정치인이 대통령이 되면 좋겠다”는 소망도 곁들였다. 문 실장의 바람과는 달리 노무현 대통령 이후 등장했던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도 화합형 정치인과는 거리가 멀었다.

노무현정부에 대한 여러 평가가 있었고, 그런 평가는 시간이 지나면서 바뀌기도 한다. 모든 일이 그렇듯 공도 있고 과도 있다. 하지만 굳이 싸우지 않아도 될 사안과 싸웠던 것은 공보다는 과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니, 상대방이 있는 싸움을 일방의 잘못이라고 말하긴 어렵다. 그러나 투쟁이 과했다는 점은 노무현정부에서 일했던 문재인 대통령 측근들도 인정하는 일이다.

2012년 갑작스레 대선에 호출된 문재인 후보는 투쟁형이라기보다는 화합형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청와대 민정수석 근무 초기 기자들의 전화에 일일이 대응하다 몇 차례 인사가 새어나가는 해프닝도 있었다. ‘사람이 먼저’라는 2012년 대선 슬로건도 좋았다. 이번 대선 기간 문재인 후보는 투쟁형이었다. “문 후보가 달라졌다” “문 후보의 권력 의지가 강해졌다”는 말이 많았다. ‘적폐 청산’은 투쟁형 정치인 문재인의 변화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슬로건이었다.

문재인 후보가 대통령이 됐다. 문재인 대통령은 5년 동안 수많은 대한민국의 난제들과 마주해야 한다. 해야 할 일도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을 것이다. 개인적인 바람을 말하자면 목표를 너무 높게 잡지 않았으면 한다. 8년 임기를 마친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사례도 참고하면 좋겠다. 오바마 전 대통령의 업적에 대한 평가는 다를 수 있겠다. 미국 국내 사정이니 오바마 케어가 성공했는지도 잘 모르겠고, 대북 전략적 인내 정책이 한반도 평화통일에 도움이 됐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신문지상이나 방송을 보면 미국인들은 오바마 전 대통령의 소통과 태도를 존경하고 자랑스러워하는 듯하다. 누구와도 대화하고 참고 인내하며 조금씩 바꿔 나갔다는 평가들이 기억난다.

문재인 대통령은 목표보다는 과정에 집중하는 대통령이 됐으면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새 시대의 맏형이 되고 싶었지만 구시대의 막내가 됐다고 한탄한 적이 있다. 그로부터 10년이 넘게 흘렀다. 문재인 대통령이 새 시대의 맏형이 될 수 있는 길은 투쟁보다는 화합에 있지 않을까. 목표보다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 그 답이 있을 것이다.

“어떤 문제에 대해 가능한 한 가장 정확한 진리를 얻기 위해서는 상이한 의견을 가진 모든 사람의 생각을 들어보고, 나아가 다양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시각에서 그 문제를 이모저모 따져보는 것이 필수적이다. 현명한 사람치고 이것 외에 다른 방법으로 지혜를 얻은 사람은 없다.”

영국의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이 158년 전인 1859년에 쓴 ‘자유론’에 등장하는 대목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한국 정치사상 첫 화합형 대통령이 되기를 기대한다.

남도영 정치부장 dy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