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김영석] 총리 서리 4연패

입력 2017-05-10 17:33

1948년 5월 10일 대한민국에서 민주선거 원칙하의 첫 선거가 치러졌다. 제1대 국회의원 선거다. 제주도를 제외한 198개 선거구에 948명이 입후보했고, 198명이 당선됐다. 투표율은 95.5%로 아직도 최고 자리에 있다. 여당 격인 이승만 전 대통령의 대한독립촉성국민회는 55석에 불과했다. 제1야당 격인 한국민주당도 29석에 머물렀다. 무소속이 85명으로 42.5%를 차지했다. 두 정당을 포함해 1석 이상을 가진 정치 단체는 16개나 됐다. 절대적인 여소야대였다.

이 전 대통령의 선택은 협치가 아닌 독주였다. 합의 단계였던 내각책임제하의 명목상 대통령을 거부하며 대통령중심제를 주장했다. 결국 대통령은 국회에서 간선으로 선출하고, 국무총리를 대통령이 국회 승인을 받아 임명하는 기형적 권력 구조가 탄생했다. 더구나 대통령으로 확정된 뒤인 7월 22일 조선민주당 소속 이윤영 의원을 초대 총리로 전격 지명했다. 김성수 한민당 수석총무 기용을 기대했던 야권의 바람을 저버렸다. 이윤영 총리 승인안은 59대 132의 압도적 표차로 부결됐다. 50년 4월, 52년 4월, 같은 해 10월에도 이 총리 승인안이 상정됐지만 고배를 마셨다. 총리 서리로만 국회에 4연패하는 불명예를 당한 셈이다. 이 전 대통령은 50년 백낙준, 52년 이갑성 총리 승인안도 밀어붙였지만 국회의 벽에 막혔다. 54년 11월 대통령 3선을 허용한 ‘사사오입’ 개헌을 통해 국무총리직을 없애버렸다.

이 전 대통령은 총리를 대통령 보좌역 정도로 인식했다고 한다. 48년 7월 당시 신문 기사를 보면 이 전 대통령은 “할 일이 많은데 총리 같은 것은 선결문제가 아니다”라고 했다. 야당과의 협치를 고려하지 않은 점이 더 큰 문제였다. 여소야대 상황만 놓고 보면 지금과 닮아 있다. 아니 그때보다 협치와 소통이 더 절실하다. 문재인 대통령이 야당과의 교감 없이 국정을 독단적으로 운영하려 든다면 이 전 대통령의 전철을 밟을 수도 있다. 역사가 주는 교훈을 되새겨볼 때다.

김영석 논설위원, 그래픽=이영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