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인권을 말할 수 없는 시절이 있었다. 신군부가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1980년대. 그 시절 권리를 주장하거나 조합을 결성한 노동자, 또는 협력자는 자유시장경제 체제를 가로막는 ‘데모꾼’으로 매도됐다. 무력으로 집권한 신군부는 갑작스럽게 막을 내린 유신정권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엄혹한 시절은 계속됐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은 그 무렵 등장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권력을 이양하고 3개월 지난 1988년 5월 정의실현법조인회(정법회), 청년변호사회(청변)를 통합한 단체였다. ‘서른다섯 문재인’은 그때 25명 선배·동료 변호사와 함께 민변 부산지부를 발족했다.
문재인. 29년 전 그는 부산에서 이름을 날린 인권변호사였다. 1986년 1월 부산 부민동에 노동법상담소를 개설하고 3년 동안 300건 이상 소송을 맡아 70%의 높은 승소율을 기록했다. ‘동업자’는 당시 인권변호사였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었다.
상담소를 찾는 사람 대부분은 부당해고, 산업재해, 수당 미지급으로 생활고에 시달린 노동자들이었다. 두 인권변호사는 이들의 형편에 따라 무료 변론을 맡기도 했다. 1987년 7월부터는 울산과 경남 창원으로 활동영역을 넓혀 사업장 60곳의 노동조합 결성을 지원했다. 두 인권변호사에게 노동법 상담은 단순한 생계 수단이 아니었다. 노동인권운동이었다.
1988년 12월 10일 창간 1호를 발행한 국민일보는 ‘인권변호사 문재인씨’로 소개했다(사진). 유엔 세계인권선언 40주년에 창간한 국민일보가 한국 인권운동 특집으로 실은 인터뷰였다. 대통령 당선이 확실시되는 현재의 그를 상징하는 흰색 머리카락은 검은색이었고 안경테는 지금보다 두꺼웠지만, 눈빛은 그대로였다.
그는 국민일보 창간호에 실린 인터뷰에서 “노동 현장의 인권유린을 참을 수 없다”고 성토했다. 또 민주주의 정착을 위한 과제로 “‘5공 비리’(전두환정부 권력형 비리) 척결을 통한 분배의 정의 실현”을 꼽았다.
그가 당시 가장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던 사건은 1987년 현대엔진 노조 결성이었다. 현대그룹에서 처음 노조가 등장한 일이었다. 그는 재판 때마다 “인간다운 대접을 받고 싶다”는 노동자들의 투박한 진술에서 진정성을 느꼈다고 했다.
누구도 노동인권을 쉽게 말할 수 없었던 그 시절 그는 “시국사범 사면에서 경제성장의 주축인 노동자들을 외면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당시 횡행했던 사측 구사대와의 충돌 과정에서 폭력행위로 처벌받은 노동자는 시국사범으로 분류돼 사면·복권에서 제외되고 가족과의 면회조차 제한된다고 그는 지적했다. 이런 그에게 민변 대표간사였던 1세대 인권변호사 조준희씨는 “용기와 실천력을 겸비한 청년의 대표변호사”라고 평했다.
대통령 파면으로 막을 내린 박근혜정부는 대한민국의 시계를 29년 전으로 돌렸다. 시곗바늘을 되돌리는 일. ‘예순넷 문재인’이 해결할 첫 번째 과제다.
김철오 기자 kcopd@kmib.co.kr
29년 전 국민일보 창간호에 실린 ‘인권변호사 문재인’
입력 2017-05-10 05: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