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봉화, 청량한 신록 속에서 맑은 선비정신을 배운다

입력 2017-05-11 00:00
경북 봉화군 명호면 관창리 만리산 자락 ‘사진찍기 좋은 녹색 명소’를 찾은 여행객이 이른 아침 은은한 안개에 싸인 청량산과 낙동강 물줄기를 바라보고 있다.
청량산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최고의 전망대인 축융봉 정상에서 본 청량산 전경.
초록빛의 왕버드나무와 분홍빛 철축이 수놓은 봉화읍 유곡1리 닭실마을의 청암정이 연못에 반영을 드리우며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경북 봉화군은 태백산에서 소백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에 자리 잡고 있다. 영남 최북단으로 전체 면적의 83%를 산림이 차지하고 있어 ‘산골 오지’로 알려져 있다. 그 만큼 산 깊고 물 맑은 청정 자연을 자랑한다. 여기에 조선시대 선비정신이 담긴 고택과 정자, 옛집에 깃든 선조들의 숨결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보물’도 지니고 있다.

청량산을 한눈에 조망하는 비장의 명소

일찍 찾아온 더운 여름 날씨에 이름만 들어도 시원하고 상쾌한 느낌의 산이 있다. 청량산(淸凉山). 이름 그대로 청량한 기운이 감도는 청량산은 경북 봉화와 안동 땅에 걸쳐 있는 크지 않은 산이다. 최고봉이 870m에 불과하다. 그리 높지는 않지만 낙동강과 몸을 섞으며 천길단애를 이룬 12개 기암절벽은 만만하지 않다. 경북 청송의 주왕산, 전남 영암의 월출산과 함께 ‘국내 3대 기악(奇嶽)’에 꼽힌다.

청량산은 주세붕이 명명한 12봉우리(육육봉·六六峯)가 주축을 이루며 태백산에서 발원한 시원한 낙동강이 산의 웅장한 절벽을 끼고 흐른다. 산 밖에서 청량산 전체를 온전히 볼 수 있기로는 축융봉(845m)이 제일이다. 청량산의 중심부인 청량사 맞은편에 우뚝 솟은 봉우리로, 청량산 12봉 중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11봉을 볼 수 있는 최고의 전망대다.

청량산도립공원 끝자락 ‘산성입구’ 팻말이 세워진 곳이 들머리다. 이곳에서 축융봉까지는 2㎞. 왕복 2∼3시간은 족히 걸린다. 경사진 비포장 임도를 따라 약 300m를 가면 탐방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청량산성 성곽을 따라 정상으로 오르거나 임도를 따라 공민왕당을 지나 정상으로 오르는 갈림길이다. 청량산성은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공민왕이 1361년 홍건적의 난을 피해 몽진해 왔을 때 개축됐다.

오른쪽 계단을 선택하면 곧바로 성곽 위에 올라서게 된다. 봉화군이 예전 흔적을 바탕으로 새로 산성을 복원해 놓았다. 주변의 자연석을 다듬어 쌓았다. 폭이 4m쯤 된다. 말 다섯 필이 동시에 다닐 수 있다고 해서 오마대도(五馬大道)로 불렸다고 한다. 바위구간을 지나는 성벽에 철계단과 데크로 깔아 오르내리기에 편하도록 길을 내놓았다. 15분쯤 지나면 오른쪽으로 크게 휘돌아가는 성곽 끝에 망루가 우뚝 서 있다. 밀성대(密城臺)다. 공민왕이 군율을 어긴 부하들을 처형하는 장소로 주로 썼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단애를 이룬 거대한 절벽 위 망루에 올라서면 맞은편 청량산의 기기묘묘한 봉우리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깎아지른 듯한 퇴적암이 층을 이룬 절벽과 불룩불룩 솟은 암봉들이 초록빛 신록을 머리에 이고 시선을 사로잡고 있다. ‘작은 금강산’이 딱 맞다.

밀성대를 돌아나가는 성곽을 따라 정상으로 향하는 길을 걷다보면 위치에 따라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보이는 청량산을 볼 수 있어 잠시도 지루할 틈이 없다. 20여분 성곽을 따라 가다 가파르고 긴 계단을 오르면 북문이 있던 장소에 데크를 깔아 놓은 넓은 전망대에 닿는다. 이곳부터 2009년 옛 모습으로 복원된 토성이 이어진다.

축융봉 정상에 서면 사방으로 조망이 시원하다. 최고의 조망지점답게 맞은편 청량산 암봉들이 빠짐없이 시야에 잡힌다. 청량산 오른쪽 어깨 너머에 멀리 영양군 일월산 정상이 눈에 들어온다. 정상에는 표석과 청량산을 제대로 알아볼 수 있도록 각 봉우리를 설명한 안내도가 나란히 서있다.

청량산 풍경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또 하나 있다.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청량산과 이웃한 만리산(萬里山·792m)이다. 이름처럼 ‘1만리’에 달하는 주변 풍경을 내다볼 수 있다. 만리산 자락에 관창리 마을이 있다. 승용차로 올라 청량산과 낙동강을 한눈에 볼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오마교를 건너 산자락 8부 능선쯤의 사과밭 갈림길에서 우회전해 ‘오렌지 꽃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 펜션 이정표를 따라 가면 된다. 길을 따라가는 내내 오렌지 꽃 향기 대신 사과 꽃 향기가 코를 자극한다.

펜션 앞마당은 한국관광공사가 지정한 ‘사진찍기 좋은 녹색 명소’다. 축융봉에서 보는 아기자기한 앞모습과 달리 이곳에서는 우람하고 늠름한 뒷모습을 볼 수 있다. 청량산이 김생의 글씨처럼 획이 뾰족한 뫼 산(山)자로 보인다. 낙동강 상류의 굽이치는 물결과 퇴계 이황 선생이 만년에 사색을 하며 즐겨 거닐었다는 ‘예던길’도 손에 잡힐 듯 가깝다. 강물에서 피어 오른 은은한 안개에 살짝 숨은 봉우리들이 한 폭의 수묵화를 그린다. 그 옆으로 흘러가는 낙동강과 나란한 35번 국도는 2011년 미슐랭가이드에서 별점 하나를 받은 ‘명품길’이다.

봉화 선비의 강직함과 격조

봉화읍 유곡1리 닭실마을은 실학자 이중환의 지리서 ‘택리지(擇里志)’에 경주 양동마을, 풍산 하회마을, 안동 내앞마을과 함께 삼남(三南·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를 통틀어 이르는 말)의 4대 길지(吉地) 중 하나로 나와 있다.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에다 암탉 형태의 나지막한 산이 알을 품듯 포근하게 마을을 감싸고 있는 금계포란(金鷄抱卵)형이다.

마을은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조선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였던 충재( 齋) 권벌(1478∼1548) 선생이 500여년 전에 마을에 든 뒤 자손들이 대를 이어 살아온 안동 권씨 집성촌이다. 충재 선생은 선비로서의 강직함과 격조를 몸으로 보여준 충절의 사표(師表)였다.

마을 한켠에 자리잡고 있는 청암정은 닭실마을의 중심이자 정체성을 상징하는 곳이다. 청암정은 거북 모양의 바위 위에 지은 정자다. 충재 선생이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돼 파직된 뒤 닭실마을로 내려와 큰아들 권동보와 함께 세웠다.

쪽문을 열고 들어서니 아담한 공간이 나타난다. 건물은 청암정과 충재 선생의 숙소이자 서재로 쓰이던 별채 ‘충재’가 전부다. 바위에 거의 손을 대지 않고 주춧돌과 기둥의 높낮이를 조정해 지었다. 바위주변에는 거북이 좋아하는 물을 담기 위해 인공연못을 조성했다. 마당에서 정자까지는 돌다리를 걸쳐놓았다. 많이 밟고 다닌 돌은 닳고 달아 시간이 뚜렷하게 각인돼 있다. 정자에는 매암 조식이 쓴 ‘청암정’ 현판과 미수 허목이 쓴 ‘청암수석’ 현판이 걸려 있다. 수백 년 살았음직한 왕버들은 세월의 무게를 지고 반쯤 누웠다. 우거진 녹음과 정자 옆 바위 위에 핀 철쭉이 청암정의 풍경을 돋우고 있다.

청암정 바로 곁에는 충재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고려시대부터 근대까지의 보물 482점을 포함해서 총 1만여 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특히 충재일기(보물 제261호), 근사록(보물 제262호), 중종 2년인 1507년 과거 때 제출한 답안지 등을 통해 그 시대를 가늠해볼 수 있다.

■범바위 전망대 물돌이 풍경도 볼 만… 솔 향 나는 돼지숯불구이·송이요리

수도권에서 승용차를 이용해 청량산에 닿으려면 중앙고속도로 영주나들목→36번 국도→봉화읍→봉성면→918번 지방도→35번 국도→청량산도립공원 순으로 간다. 풍기나들목에서 5번 국도를 타는 방법도 있다.

청량산에는 모두 5개의 탐방코스가 있다. 2.3∼12.7㎞로 1시간에서 9시간까지 다양하다. 축융봉 가는 길은 4코스로, 산성입구에서 안내소까지 5.1㎞에 2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정상에서 원점회귀해도 좋다.

펜션 겸 찻집인 '오렌지 꽃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는 청량산 들머리에서 35번 국도를 타고 북곡보건진료소를 지나자마자 왼쪽으로 자그마한 시멘트다리 '오마교'를 건너간다. 마을과 너른 사과밭 사이로 구불구불 오르락내리락 실낱같은 길이 이어진다. 길이 좁아 곳곳에 교행할 수 있는 곳이 있지만 앞에서 오는 차를 만나면 후진을 감내해야 한다. 가까운 곳의 범바위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물돌이 풍경(사진)도 볼 만하다. 봉화여행에서 먹어봐야 할 대표 음식은 돼지숯불구이. 참나무 숯이 아닌 솔 숯을 이용해 적당히 구운 돼지고기에 솔잎을 얹은 후 몇 차례 더 구워 솔 향을 입힌다. 청량산에서 약 20㎞ 거리의 봉성면사무소 일대에 돼지숯불구이 식당이 몰려 있다. 송이버섯으로 이름난 고장인 만큼 송이전문식당도 많다.

남호철 여행선임기자, 봉화=글·사진 남호철 여행선임기자 hc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