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표 한 표 소중함 알기에… 부릅뜬 ‘시민의 눈’

입력 2017-05-09 05:00
시민들이 지난 2일 서울 은평구 서울혁신파크에서 투개표 참관인이 해야 하는 일을 배우고 있다. 참관인으로 선정된 시민들은 9일 대선 투개표소에서 현미경 감시에 나선다.

19대 대선 개표참관인으로 선정된 임채민(46)씨는 지난해 20대 총선 때 개표참관인 자격으로 개표 과정을 감독했던 일을 떠올리면 얼굴이 달아오른다. 처음 참관을 했던 임씨는 혼자서 모든 개표 과정을 살펴보려다 우왕좌왕하기만 했다. 사람이 많았고 표는 쉴 새 없이 오갔다. 한 사람이 따라가기엔 벅찼다.

임씨는 이번 대통령 선거 개표 때는 심사집계부에서 참관할 계획이다. 심사집계부는 개표사무원들이 표가 뒤섞이지 않았는지 확인하는 부서다. 기계를 이용해 1차로 표를 분류하는 투표지분류기운영부를 감독하는 건 동료 참관인에게 맡기기로 했다. 임씨는 “개표소에 투표함이 들어오면 봉인 스티커가 투표함에 단단히 붙어 있는지, 개표가 시작되면 개표사무원들이 개표상황판에 잘못된 숫자를 쓰는 건 아닌지 집중해 살펴보겠다”고 8일 말했다.

이어 “투개표까지 끝나야 선거가 마무리된 것이라 생각한다”며 “형식적으로 서 있다 오는 게 아니라 시민들에게 투개표 과정에 이상이 없다는 확신을 주고 싶다”고 했다.

자영업자 양진명(50)씨는 지난 2일 거소투표소의 투표참관인으로 선정돼 유권자들이 투표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투표함에 봉인 스티커 3개가 튼튼하게 붙어 있는지, 투표지 회송용 봉투가 우체통에 빠짐없이 들어가는지 들여다봤다.

임씨와 양씨처럼 19대 대선 투개표 과정을 직접 감시하려는 시민들이 조직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부정선거 의혹에 시달린 시민들이 직접 나서 자신의 선거권을 지키려 움직이고 있다”고 했다.

‘시민의 눈’이라는 시민단체는 시민 투개표 참관인을 교육해 왔다. 시민의 눈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역할을 보조하는 일종의 시민선거관리위원회다. 시민의 눈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파면이 결정되고 대통령 선거 일정이 확정된 3월부터 이번 대선에 참여할 투개표 참관인을 모집하고 이들이 투표소와 개표소에서 해야 할 일들을 가르쳐 왔다. “전에도 참관인을 했었는데 뭘 해야 할지 몰라 제 역할을 못했다”는 시민들이 주로 모였다.

은평구 시민의 눈 대표 심광보(49)씨도 20대 총선 때 참관인들이 헤매는 모습을 보면서 “참관인들이 미리 공부를 해가야 제 몫을 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이번 대선의 투개표 참관인 교육을 준비해 왔다. 3월 중순부터 시민 30∼40명이 꾸준히 은평구 시민의 눈을 찾았다. 관악구 시민의 눈도 시민 40여명을 투개표참관인으로 교육했다. 유심히 지켜봐야 할 포인트, 사진이나 영상으로 기록을 남기는 법, 의혹이 있을 때 문제를 제기하는 방법 등을 꼼꼼하게 배웠다.

교육을 받은 시민들은 정당이나 후보자 측의 추천을 받거나 선관위에 직접 지원해 선정돼야 투개표 과정에 참여할 수 있다. 시민의 눈은 교육받은 시민들을 각 정당에 참관인으로 추천해 달라고 신청했다. 은평구 시민의 눈에서만 23명이 정당 추천한 개표참관인으로 선정됐다. 더불어민주당 5명, 정의당 2명, 민중연합당 4명, 한국국민당 12명씩이다. 시민의 눈을 거치지 않고 선관위에 직접 지원해 개표참관인으로 추첨된 시민도 1명 있다.

선관위도 시민들이 현미경 감시에 나서는 것을 반겼다. 김옥채 은평구선거관리위원회 관리계장은 “선관위는 투개표 과정을 꼼꼼히 살피겠다는 시민들 뜻을 존중한다”며 “시민들의 의혹을 해소하도록 선거관리를 철저하게 하겠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시민들이 투개표 감시에 적극적인 모습은 민주주의가 성숙한 결과라고 평가했다. 한상희 건국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 디도스 사태와 2012년 대선 부정선거 의혹을 겪은 시민들이 스스로 선거권을 지키려고 나선 것”이라며 “시민들이 더 이상 멀리서 선거를 지켜만 보는 게 아니라 직접 나서서 선거에 이상이 없는 지 살피는 능동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평가했다.

김의영 서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도 “참여민주주의가 성숙하고 있다는 방증”이라며 “투개표 절차를 공부한 시민들이 직접 지켜보고 있는 만큼 선관위가 실수 없이 투개표를 마치는 게 중요해졌다”고 말했다.

글·사진=오주환 구자창 기자 joh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