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의 작곡가 스메타나는 우리에게 ‘몰다우’라는 곡으로 잘 알려진 교향시 ‘나의 조국’에서 종교개혁자 얀 후스의 이야기를 음율로 표현했다. 프라하 구시가지 한가운데에는 후스를 기념하는 동상이 있다. 동상 아래에는 죽음과 믿음으로 항거하며 남긴 문구가 기록돼 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여, 진리를 들으라, 진리를 전하라, 진리를 따르라!”
후스는 성서에서 증언되는 진리, 곧 하나님의 사랑이 몸으로 드러난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진리임을 열정적으로 강조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사했다는 해방의 복음을 선포하는 데엔 무관심하면서 성서를 읽을 수 없었던 무지한 중세 평민들을 죄와 벌이라는 두려움의 올무에 가두는 방법으로 독점적 권위를 유지했던 중세교회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교회가 본연의 모습을 상실하고 부패했던 시대에 후스는 교권정치의 죄악을 직시하고 교회의 개혁을 부르짖었다. 그러나 그가 외친 개혁의 소리는 기득권을 장악했던 교회 지도자, 이들과 결탁한 정치 권력자에 의해 정면으로 거부됐다. 21세기에 와서야 로마교황청은 후스에게 화형을 선고했던 콘스탄츠공의회의 결정이 부당했다고 시인했다.
후스의 대표적 설교는 ‘브올의 아들 발람과 그의 나귀’(민 22:21∼35)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던 발람은 어느 날 모압 사람들과 함께 길을 나서려고 했으나, 이는 하나님이 원하는 방법이 아니었다. 하지만 발람은 이를 미처 깨닫지 못했다. 발람이 길을 나서자, 주의 천사가 나귀를 타고 가는 발람의 길을 막고 나섰다. 발람은 그 천사를 보지 못했고, 발람의 나귀만이 주의 천사를 알아봤다. 나귀는 발람이 제대로 걸어 나아가지 못하도록 발람을 벽에 부딪치게도 하고 주저앉히기도 했다. 발람이 모압 귀족들과 길을 떠나지 않게 하려했던 것이다.
발람은 나귀를 지팡이로 때렸고, “내게 칼이 있었더라면 나귀를 죽여 버렸을 것”이라고 했다. 그때 주님에 의해 입이 열려진 나귀가 주인을 깨달음으로 인도한다. 그제야 발람은 두 눈이 열려 자신의 앞에 주의 천사가 서 있음을 보게 된다. 주의 천사의 설명을 듣고 난 후에야 그는 자기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행동할 뻔했다는 것, 자신의 나귀가 그 행동을 막아줬음을 깨닫고 뉘우치게 된다. 후스가 이 설교를 통해 전하고자 한 것은 발람과 같은 지도자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을 할 경우 일반 성도가 깨어 일어나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중세 교회를 개혁하려 했던 한 종교 개혁자의 이 설교를 종교개혁 500주년의 해에 다시 한 번 기억하고자 한다. 바로 오늘 19대 대통령선거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떨쳐 일어나 발람의 나귀가 돼야 한다. 정치 권력자와 교회 지도자가 깨어나지 못할 때 성령의 도우심을 입은 사람들은 발람의 나귀 역할을 해야 한다.
최순실 사태를 통해 가려졌던 최고 권력자의 많은 부조리들이 낱낱이 드러났다. 이제 우리는 그 어떤 시기보다 진정한 지도자를 갈망하고 있다. 당장 우리 자신의 이해관계라는 눈 앞의 일을 위해서 뿐 아니라 이 땅에서 살아갈 후손들까지 생각하며 우리의 지도자를 선택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건대 우리 모두가 발람의 나귀가 될 수 있다. 때로는 정치에 대한 무관심 때문에, 때로는 불의에 저항할 용기가 없어서 우리는 발람의 나귀가 될 수 없었다. 왜 발람이 저 모양인가를 탓하는 일보다, 우리가 발람의 나귀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가를 겸허히 물어야 할 것이다. 인간적 욕심이 앞서서 판단력을 잃고 헤매는 발람에게 그 잘못을 깨우쳐 줄 수 있는 나귀! 그 역할을 할 책임은 우리 모두의 몫이다. 우리는 선출된 지도자와 함께 이분법적 진영논리에서 벗어나 ‘헬조선’을 ‘꿀한국’으로 바꿀 지혜와 열정을 모아야 할 것이다.
정미현 (연세대 교수)
[시온의 소리] 발람과 그의 나귀
입력 2017-05-09 0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