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배병우] 오늘 처음으로 투표하는 딸에게

입력 2017-05-08 18:27 수정 2017-05-08 21:33

딸 주희에게. 대학 신입생의 흥분과 기대가 잔뜩 묻어나는 너를 볼 때마다 나도 20대 초반으로 돌아가곤 한다. ‘젊음이란 참 좋은 것이구나’ 혼자 되뇐다. 최근 잇따른 혈육의 서거에 낙담했기에 너의 생기는 더욱 눈부시고 놀랍다. 얼마 전 너는 ‘이번 대선에서 아빠는 누굴 찍을 거야’라고 물었지. 아빠는 즉답을 피했었다. 이 편지를 그 질문에 대한 조금 늦은 답으로 읽어줬으면 한다.

‘리더십의 절반 이상은 인격(character)’이라는 말이 진리라고 아빠는 믿는다. 좋은 인격의 구성요소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릴 수 있다. 하지만 책무에 대한 성실, 남에 대한 배려와 존중, 절제, 경청(傾聽) 등은 누구나 동의할 자질일 것이다. 국민과 국가의 운명을 짊어진 지도자라면 최소한 이런 자질은 갖춰야 한다고 믿는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불행을 맞은 것은 인격의 결함에서 기인한 측면이 크다. 인간적인 품위(decency)를 갖춘 인물인지가 대통령의 첫째 기준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번에 출마한 유력 후보들이 인간적 품위를 갖췄는지 꼼꼼히 다시 살펴볼 일이다.

아빠가 꼽는 차기 대통령의 두 번째 기준은 역경에 굴하지 않는 용기와 결단력이다. 현재 한국은 안팎으로 커다란 위험에 직면해 있다. 북한의 핵·미사일 전력이 하루가 다르게 증강하는 가운데 미국 중국 일본 등 주변국이 우리의 국익을 사정없이 침탈하고 있다. 건국 후 우리 외교와 안보가 이처럼 파탄지경에 처한 것은 6·25전쟁 때를 제외하고 처음일 것이다. 소득과 자산 양극화, 출산율 급락, 성장잠재력 추락 등으로 내정(內政)에도 빨간불이 켜진 지 오래다.

16세기 초반에 활약한 이탈리아의 정치사상가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저술한 때도 이 같은 이행기, 대전환기였다. 마키아벨리는 악의적인 운명의 힘에 맞서기 위해서는 비르투(virtu)를 가진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아빠가 말하는 대통령의 두 번째 기준은 이 비르투와 일맥상통한다. 현재 한국에도 ‘주체적 의지’나 ‘역량’으로 번역되는 비르투를 가진 리더가 절실하다. 비르투는 정치지도자가 자신의 국가가 처한 현실을 깊이 고민하는 가운데 이를 해결할 비전을 꿈꾸는 가운데 나온다. 지금이라도 각 후보의 살아온 길과 대선 토론회 등에서의 언행을 되새겨 보라. 누가 비상한 현실을 가장 고민하고 현실성 있는 비전을 제시하며 불굴의 해결 의지를 가졌는지 살펴보라.

마지막이지만 결코 중요성이 뒤지지 않을 세 번째 잣대는 헌법정신을 이해하고 ‘법의 지배’를 존중하는지 여부다. 지난해 11월 이후 촛불 정국을 거치며 전 국민이 통절히 깨달은 게 있다. 역대 대통령의 헌법에 대한 몰이해와 무시다. 박 전 대통령의 경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헌법 제1조 1항의 진정한 의미를 대통령 취임 때는 물론 탄핵 이후에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본다.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를 구호로만 이해하고, 집권하면 제왕적 행태로 복귀할 후보를 가려내는 것은 중요하다. 법치는 민주주의 시스템이 작동하기 위한 기본 중 기본이라는 점에서 보수와 진보가 따로 있을 수 없다.

아빠가 말한 이들 기준을 참고하더라도 결국은 너 자신의 결정이고 선택이어야 함을 잘 안다. 명심할 것은 이번 투표가 끝이 아니라 시작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점이다.

투표 이후에도 차기 대통령의 행로를 감시하고 바른 공약과 비전이 실현되도록 참여하고 발언하는 것이 공동체 구성원의 의무일 것이다. 생애 첫 투표로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공화국의 책임 있는 일원이 된 것을 축하한다.

배병우 편집국 부국장 bwb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