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잃은 것보다 부모님 영정사진과 족보를 구하지 못한 것이 너무나 죄송스럽습니다.”
7일 오전 강원도 강릉시 관음리 일대 야산에서 하얀 연기가 곳곳에서 피어올랐다. 물통을 짊어진 수십명의 군인들이 가파른 산을 오르내리며 잔불을 정리하고 있었다. 머리 위로는 대형 산불진화 헬기가 쉴 새 없이 오가며 야산에 물을 쏟아냈다.
관음리 마을 입구의 도로 양옆 야산은 잿더미로 변해 있었다. 산과 인접한 집들은 간밤에 할퀴고 간 화마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벽돌은 모두 무너져 내렸고 철제 기둥은 엿가락처럼 휘어버렸다.
58년 동안 살던 터전을 잃은 최종필(76)씨는 집터를 떠나지 못하고 하염없이 한숨만 쏟아냈다. 최씨는 “어제 오후 산불감시원이 마을 곳곳을 돌면서 대피하라고 다급하게 소리쳐 문중서류만 챙겨 허겁지겁 집을 빠져나왔다”면서 12대 종손으로서 부모 영정과 족보를 챙겨 나오지 못한 것을 연신 안타까워했다.
6∼7일 강원도 강릉과 삼척, 경북 상주를 비롯해 전국에서 크고 작은 산불 20건이 발생해 오후 10시 현재 가옥 30채가 불에 탔고 3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170㏊(잠정)가 넘는 산림이 잿더미로 변했다.
강릉 산불은 6일 오후 3시27분쯤 성산면 어흘리 야산에서 발생했다. 산림 당국은 초속 15∼20m의 강한 바람이 불면서 진화에 어려움을 겪자 관음·위촌·금산리 등 6개 마을 주민 311명에게 대피령을 내렸다. 주민들은 성산·강릉초교, 노인종합복지회관 등지에 대피해 뜬눈으로 밤을 보냈다. 아내와 누나, 딸과 함께 성산초교로 대피한 임종근(81)씨는 “아침에 가보니 소방차가 마당까지 들어와 불이 옮겨 붙는 것을 막고 있었다”며 “걱정돼 한숨도 못 잤는데 집에 불이 나지 않아 천만다행”이라고 말했다.
강릉 산불은 발생 19시간 만인 7일 오전 10시36분쯤 큰 불길이 잡혔지만 일부 지역에서 강한 바람에 불씨가 되살아나면서 불길이 다시 번져 밤새 진화에 어려움을 겪었다. 강릉 지역은 이번 불로 성산면 18채, 홍제동 12채 등 모두 30채의 주택이 불에 탔고 50여㏊의 산림이 소실됐다.
앞서 6일 오전 11시40분쯤 삼척 도계읍 점리 야산에서도 불이 나 7일 밤까지도 계속 이어졌다. 도계읍 늑구1리 22가구 30여명의 주민들이 대피했고 산림 피해면적은 오후 6시 현재 100㏊로 집계됐다. 강릉과 삼척의 산불은 입산자 실화로 추정되고 있다.
경북 상주시 사벌면 덕가리에서도 6일 오후 2시13분쯤 과수원에서 쓰레기를 태우다 불이 산으로 옮겨 붙어 임야 13㏊를 태웠다. 불은 7일 오전 10시40분 진화됐지만 등산객 김모(58·여)씨가 불길을 피하다 실족해 숨졌고 장모(64)씨 등 2명이 화상을 입었다.
국민안전처는 주택이 전소된 주민에게 900만원의 주거비와 구호비 등을 지원하고 피해주민 요청 시에는 임시주거시설을 최장 6개월까지 지원하기로 했다. 또 조기복구와 산불 추가발생 방지를 위해 강릉·삼척·상주에 총 27억원의 특별교부세를 긴급 지원할 계획이다.
강릉=서승진 기자 sjseo@kmib.co.kr
강릉 12대 종손 “부모님 영정·족보 못챙겨 너무 죄송”
입력 2017-05-07 17:39 수정 2017-05-08 00: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