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상 후 긴 슬럼프에 빠졌다. 공을 치는데 ‘입스(yips·불안증세)’ 증상까지 왔다. 테니스 기대주는 이대로 주저앉는가 했다. 하지만 자신과의 싸움을 이긴 뒤 세계 정상급으로 도약하는데 성공했다.
한국 테니스의 간판스타 정현(세계랭킹 78위)이 생애 처음 남자프로테니스(ATP) 투어 대회에서 남자 단식 4강에 올랐지만 결승 진출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지난해 찾아왔던 극심한 슬럼프를 극복한 뒤 가파른 성장세를 보여주고 있기에 한국 테니스의 전설로 남은 이형택을 곧 넘어설 것이라는 기대감은 점점 더 무르익고 있다.
7일(한국시간) 독일 뮌헨에서 열린 ATP 월드 투어 250 시리즈 ‘BMW 오픈’ 4강전. 정현은 기도 펠라(아르헨티나·158위)와 결승 티켓을 두고 맞붙었지만 1대 2(6-4 5-7 4-6)로 패했다. 앞서 대회 2회전에서 정현은 세계랭킹 16위의 가엘 몽피스(프랑스)를 꺾는 파란을 일으켰고, 8강에서 마르틴 클리잔(슬로바키아·53위)마저 물리치며 4강에 올랐다.
한국선수가 ATP 투어에서 4강에 오른 것은 2007년 컨트리와이드 클래식에 나섰던 이형택 이후 10년 만이다. 정현은 내친 김에 결승 진출을 넘어 우승까지 노려봤지만 준결승 문턱에서 아쉬움을 삼켰다.
이형택은 2003년 1월 호주 시드니에서 열린 아디다스 인터내셔널 결승전에서 27세의 나이로 한국 남자 테니스 사상 첫 우승을 거뒀다. 이는 투어 대회에서 한국선수의 마지막 결승진출이자 우승이었다. 정현은 14년 만에 투어 결승에 오른 한국선수가 될 뻔했지만 다음 기회로 미루게 됐다.
그러나 21세인 정현은 이형택보다 어린 나이에 국제대회에서 남자 테니스계 강자들과 맞붙어 경험을 쌓고 자신감을 끌어올리고 있다. 더구나 정현은 자신의 지독한 슬럼프를 극복하며 나이에 걸맞지 않은 위기대처능력도 갖췄다.
지난해 정현은 복부근육 부상과 함께 내리막길을 걸었다. 시즌 초 15개 대회에서 8번이나 1회전에서 탈락했다. 지난해 5월 프랑스 오픈 1회전 탈락 후 약 4개월 동안 투어 활동을 중단했다. 공을 칠 때 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 호흡이 빨라지고 손에 경련이 일어나는 입스 증상까지 찾아왔다. 지난해 초 51위였던 세계랭킹은 146위까지 곤두박질쳤다. 정현은 공백기에 이를 악물고 유연성과 근력 향상, 몸의 균형을 잡는데 힘을 쏟았다. 각고의 노력은 서서히 효과를 나타냈다.
지난 1월 호주오픈에서 그리고리 디미트로프(15위·불가리아), 지난달 바르셀로나 오픈에서는 알렉산더 즈베레프(독일·21위), 라파엘 나달(스페인·5위) 등과 대등한 경기를 했다. 나달은 “정현은 훌륭한 선수로 성장할 수 있는 조건을 모두 갖췄다. 특히 백핸드와 스피드가 좋다”고 칭찬하기도 했다.
기량도 일취월장했다. 지난해 65%였던 첫 서브 득점률은 70%까지 올랐다. 팔과 어깨의 힘을 적절히 활용하면서 서브 폼은 한결 부드러워졌다. 다른 선수들은 20대 이후 몸에 익은 폼을 바꾸기 어렵다지만 정현은 테니스에 대한 열정과 피나는 노력으로 변화를 감행하며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코트 좌우 공간을 십분 활용하는 스트로크까지 선보이며 한층 나은 모습을 보여줬다.
다만 파워와 정확성이 좋아진 반면, 강약 조절이나 네트 플레이 등 기술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경기 후반에 힘 싸움에 밀려 지는 경우가 많았던 만큼 체력 보완도 필요하다.
박구인 기자 captain@kmib.co.kr
정말 강해진 정현, ‘전설’을 넘는다
입력 2017-05-08 0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