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각자 자기의 책임으로

입력 2017-05-08 00:00

사도 바울은 교회의 분쟁을 세상법정에 의뢰하는 것에 늘 분개했다. 우리 교계엔 하나님의 절대주권보다 판·검사의 처분에 더 기대는 ‘고소왕’들이 많다. 이들에겐 자기 때문에 이미 괴로움을 당하는 피고를 더 곤혹스럽게 만들려는 가해자의 의도가 숨어있다. 바로 이런 소송에 시달리는 한 목사에게 얼마나 힘드냐는 인사들이 오갔을 때, 나는 좀 불만스러웠다. ‘자정 능력이 뭔가. 권위 있는 목사들이 따끔한 권고를 해줘야 하지 않을까.’ 한 원로 성서학자는 “좀 힘들겠지만 그대로 놔두는 게 좋다”고 하셨다. ‘왜 그럴까’하는 생각이 화두(話頭)처럼 오래 남았다.

기독교적 가치와 구현의 방식을 놓고 헤렘(Cherem·진멸)이냐, 헤세드(chesed·자비)냐는 논쟁이 많다. 둘 가운데 어느 쪽이 진짜 하나님의 뜻이냐는 대립이다. 두 주장 모두 성서적 근거는 튼튼할 정도로 많다. 이런 개념전쟁이 왜 필요할까. 하기야 바울은 ‘영(靈)으로 시작했다 육체(肉體)로 마치겠느냐’는 물음으로 소모적 발명(發明·잘못 없음을 밝힘)을 봉쇄해버렸지만 말이다.

불일치가 존재하는 한 논쟁은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일치를 전제하기 때문에 대립과 모순도 생겨나는 것 아닐까. 일치가 좋다고, 무조건 그걸 강요하는 것은 전제(專制)이자 폭력의 위험이 수반되는 행위다. 강요가 쌍방 파국으로 귀결되는 묵시록적 세상. 결국 ‘어쩔 수 없을 것’이란 절망만이 나온다. 무책임한 ‘범(汎)인간’이 아니라 구체성을 지닌 너와 나, 우리사회, 우리나라, 우리 교회가 맞게 될 종말일까. 아니면 파국을 막을 신앙일까. 나는 기독교의 두 갈래, 즉 역사주의와 허무주의의 길이 여기서 갈라진다고 생각한다.

전도사 시절 초롱초롱한 눈망울의 학생들에게 ‘어쩔 수 없다’는 말은 배우 최민수나 하는 말이라 농담하곤 했었다. 우리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을 거슬러 올라가는 사람들이다. 어쩔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나’도 ‘어쩔 수 없이’ 이쪽이나 저쪽의 일부분이 되는 절망에 대해 보이콧하자. 어쩔 수 없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실천이다.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이 아니라 이뤄질 수 있는 사랑이 기독교의 사랑이다. 갈 수 없는 상상의 나라가 아니라 성취 가능한 나라가 하나님 나라다. 그게 우리의 신앙이어야 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 당신의 선택은 헤렘인가, 헤세드인가. 기왕 무례한 방식으로 물어본 사람이 있었으니 당신은 동성애 찬성인가, 반대인가. 믿음인가, 행위인가. 창조인가, 진화인가. 화두를 주셨던 성서학자께서 며칠 전 비답(批答)을 줬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서구 국가에선 위험한 구역을 안내하는 계고판에 ‘각자 자기의 책임으로’라는 문구를 쓴다.” ‘각자의 책임으로, 수영금지’ ‘위험, 각자의 책임으로.’ 등등.

사사기(士師記)는 각 사람이 제 소견에 옳은대로 행동했다고 쓰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이 바로 그런 때라 동의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세월호사건 같은 전대미문의 사건에서도 사람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져줄 정부나 교회, 신앙의 기적은 없었다. 좋은 의미든 아니든, 각자도생 알아서 살 수밖에 없는 시대다. 사라진 메시아의 시대란 뜻이다. 대통령이 시장에 나와 오뎅과 떡볶이를 폭풍 흡입하는 ‘먹방’을 시연하거나, 외국을 순행하며 동포 앞에 눈물을 흘린다고 무슨 의미가 있는가. 담임 목사가 택시 운전을 체험하고 강대상 밑에서 잠을 자며 지게를 지고 일꾼 ‘퍼포먼스’를 한다고 성도들의 진짜 신앙이 달라질까. 우리는 이미 그런 ‘청승의 시대’를 멀리 떠나보냈다. 프랑스혁명 당시 파리 시민들이 루이 16세를 단두대로 보냈던 것처럼 말이다.

대의와 대세는 인간 개개인의 ‘옳음’들이 합쳐져 만들어진 것이다. 역사는 바로 이런 대의와 대세에 의해 진전해온 시간의 결과다. ‘장미대선’으로 뽑힐 차기 대통령이 ‘장미의 기사’가 될지, ‘장미의 가시’가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목사든 대통령이든 ‘백마 탄 메시아’가 될 것이란 기대는 허망한 맹목일 뿐이다. 이제 우리는 ‘각자 자기의 책임으로’ 투표해야 한다. 그 투표가 어떤 목회자가 특정 보수후보를 지지하며 들먹였던 ‘범기독교계’란 이름이어선 안 될 것이다. “무화과나무 가지가 연해져 잎이 피면 여름이 온 줄 알지 않느냐.”(막 13:28).

천정근 목사(자유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