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김서정] 고맙다, 고사리

입력 2017-05-04 17:29

이 즈음 제주는 고사리 천국이다. 외진 산길 한 켠에 차들이 주르르 서 있으면, 그건 두말할 필요 없이 고사리 사냥족이다. 나도 제주 출신 지인을 졸래졸래 따라가 고사리를 꺾어봤다. 그거, 정말 재미있다! 갓 딴 고사리를 씻고 삶고 볶는 일도 서툴게 거들며 참여해봤다. 와아, 그 맛이란, 지금까지 먹어본 고사리와 차원이 달랐다! 어제는 저녁 산책길에 고사리를 딱 한 움큼 따왔다. 그리고 씻고 삶고 볶아봤다. 어깨 너머로 본 바 쉽고 간단한 듯했으니까. 그런데 으아, 쓰다! 물을 몽땅 붓고 양념 이것저것 털어 넣고 끓이는 건지 볶는 건지 뒤적거리다 다시 먹어봤더니 쓴 기는 웬만큼 가셨는데 으아, 짜다!

고사리에 대해 곰곰 생각하면서 나는 참 즐거워졌다. 고사리 앞에서 만인은 평등하다. 최고급 외제차 타고 온 배불뚝이 아저씨도, 커다란 배낭에 고무장화 차림 할머니도 고사리 앞에서 똑같이 기어 다닌다. 예외 없이 오리걸음으로 어기적거려야 한다. 고사리 앞에서 만인은 지극히 겸허해진다. 그런 벌 받는 자세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고사리 꺾기가 아니라면 갖은 원성이 터져 나올 긴 거리에도 불평하지 않고 말없이 허리 굽혀 뒤뚱거린다. 그만 하라면 극구 사양하며 더욱 더 몸을 낮춘다. 그런 겸손에 고사리는 제 몸을 통째 바쳐 보상해준다. 보상은 겸손의 강도에 정확히 비례한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대선 주자들의 토론을 보며 나는 다시 고사리를 떠올린다. 저럴 게 아니라 저이들을 한라산 중턱에 풀어놓고, 재주껏 하루 종일 고사리를 꺾게 하면 어떨까. 각기 수확한 고사리의 양과 질을 따져 가산점을 주면 어떨까. 그들이 종일 땅에 바짝 붙어 가시덤불 속에서, 말똥 위에서, 다소곳하게 고개 숙인 어린 고사리들을 발견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면 좋겠다. 그 통통하게 예쁜 초록 나물이 손가락 사이에서 똑 꺾일 때의 아릿한 감사를 느낄 수 있다면 좋겠다. 그러는 동안 들리는 온갖 새소리는 덤이다. 맑은 공기와 적당한 운동이 건강에도 좋을 테고. 이런 즐거운 상상을 선물해주는 고사리가 다시 고맙다.

김서정(동화작가·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