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고세욱] 백지선號와 KBO 잡초들

입력 2017-05-04 00:05

1990년대 중반 국내 모 실업 아이스하키팀이 캐나다로 전지훈련을 갔다. 링크장에서 몸을 풀던 ‘어떤 팀’과 연습경기를 했다. 8대 1로 대패했다. 그 팀은 캐나다의 한 동네 피자 배달원들의 동호인 모임이었다. 당시 국내 아이스하키 수준을 보여준 웃지 못할 일화다. 약 20년이 흐른 2014년 4월. 남자 아이스하키 대표팀은 세계선수권 디비전1 그룹A 대회(2부 리그)에서 5전 전패를 당해 그룹B(3부 리그)로 강등됐다. 피자보이들에게 굴욕 당할 수준은 넘었겠지만 한국 아이스하키의 발전은 여전히 더뎠다. 평창 동계올림픽 개최국으로서 망신 사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아이스하키 대표팀은 그러나 꼭 3년 만에 대반전을 이뤄냈다. 3년 사이에 3부 리그에서 2부 리그로 올라선 대표팀은 지난달 열린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강호들을 연파하고 아이스하키 최고팀들이 맞붙는 1부 리그에 사상 처음 진출했다. 동네북 한국은 세계 아이스하키계의 신성으로 떠올랐다.

여건과 인기가 아이스하키와 정반대인 국내 최고 스포츠 프로야구. 화려하고 돈 많은 스타들의 터전이지만 올 시즌 초반 눈물 젖은 빵의 가치를 알고 뛰는 잡초 선수들의 선전이 눈에 띈다.

올해 넥센 히어로즈의 주전으로 우뚝 선 허정협(27). 고교 시절 프로지명을 받지 못해 대학에 진학했다. 대학에서도 잘 풀리지 않자 야구를 그만두겠다며 1학년을 마친 뒤 현역 입대했다. 보급병으로 생활하면서 야구에 미련이 생겼다. 제대 후 그라운드로 돌아왔지만 프로구단 드래프트에서 그의 이름은 호명되지 않았다. 야구 인생은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신고선수로 오지 않겠냐는 넥센의 제안을 받는다. 사회로 치면 일종의 알바 근무였다.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3일 현재 3할대 타율, 홈런 부문 4위, 타점 7위에 올라 일발장타의 거포로 자리매김했다.

LG트윈스 외야수 이형종(28)의 출발선은 허정협과 달랐다. 명문 서울고 에이스 출신에 계약금 4억3000만원의 특급대우를 받고 프로에 데뷔했다. 화려한 경력은 거기까지였다. 팔꿈치 부상에 이어 SNS에서의 감독에 대한 항명으로 2010년 임의탈퇴 처분을 받았다. 그리고 2년간 골프 외도를 한 데 이어 군에 갔다. 제대 후 야구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으로 친정 LG의 문을 다시 두드렸다. 타자로 전향한 그는 3일 현재 타율 0.351로 타격 5위를 기록, 국내리그(KBO) 대표 강타자로 우뚝 섰다.

아이스하키 국대와 허정협·이형종은 분야나 처지, 상황이 조금씩 다르다. 하지만 이들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경기에 대한 절실함이다. 패배와 좌절에 익숙했지만 스포츠에 대한 열정과 간절함을 통해 현실을 딛고 일어섰다.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좋은 리더의 존재다. 3년 전 아이스하키 대표팀을 맡은 백지선 감독은 “꿈을 크게 가져라. 우리 목표는 평창 금메달”이라며 패배감에 젖은 선수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허정협과 이형종이 오늘의 선수로 도약한데에도 지도자들의 안목과 애정이 일조했다. 선입견으로 볼 수 있는 이들의 과거를 묻지 않고 “너 자신을 믿으라” 하던 격려는 좋은 터닝포인트였다.

6일 후면 새 정부가 들어선다. 우리 사회에는 잠재력은 있지만 현실의 벽을 넘지 못해 눈물을 쏟는 또 다른 허정협과 이형종들이 넘쳐난다. 그래서 리더의 역할은 중요하다. 대한아이스하키 정몽원 협회장은 1부 리그 승격에 기여했다는 칭찬에 “나는 선수들에게 판을 깔아줬을 뿐”이라고 말했다. 새 대통령이 가장 먼저 할 일은 젊은이들의 희망을 키우고 절실함을 담아낼 판을 마련해주는 것이다. 장만 서면 아이스하키의 기적 못잖은 역량을 펼칠 청춘들이 한국에는 많다.

고세욱 스포츠레저부장 swk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