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곡이라도 지휘자마다 다르게 들린다. 곡 해석이 틀리기 때문이다. 예술작품도 ‘악보’ 내지는 ‘시나리오’처럼 제시될 수 없을까.
국제 미술계의 전설적 전시기획자인 스위스 출신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49)는 1993년 파리의 한 카페에서 프랑스 작가 크리스티앙 볼탕스키(73) 등과 어울려 이런 기발한 논의를 했다. 격론 끝에 탄생한 것이 일명 ‘두잇(do it)’ 전시. 그 해 오브리스트가 선정한 12명의 국제적 작가들이 쓴 지시문이 9개국으로 번역돼 출간됐다. 이듬해 오스트리아에서 그 지시문을 해석한 작품전이 처음 열렸다. ‘두잇’전은 이후 20여 년간 전 세계 60여 곳에서 이어지고 있다. 전시가 인기를 끌면서 국제큐레이터협회(ICI)가 위탁 관리할 정도.
그 유명한 전시가 한국에 왔다. 서울 종로구 세종로 일민미술관이 제안해 ‘do it 2017, 서울’이라는 이름으로 개최되고 있는 이 전시에는 프랑스 미디어 아티스트 피에르 위그, 덴마크 설치 미술가 올라퍼 엘리아슨 등 국제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미술가 뿐 아니라 안무가, 이론가 등 44명의 지시문이 사용됐다. 구민자, 박혜수, 홍승혜, 호상근 등 20여명의 작가와 무용가, 그리고 공모를 통해 참가를 신청한 아마추어들까지 가세해 그 지시문을 자기식으로 ‘번역하거나 창작한’ 작품을 내놨다. 지시문이 오픈 소스처럼 공개돼 창조적으로 수용되고 작가와 관객의 경계마저 허물어지고 있는 것이다. ‘오렌지색 전시’라는 별칭은 오브리스트가 소비자와 생산자의 경계를 허무는 스위스판 생협 미그로스 슈퍼마켓 체인의 정신을 본받겠다며 그 로고색상을 따서 명명한 것이다.
호상근 작가는 ‘호상근 재현소’를 차렸다. ‘당신 계정의 비밀번호로 연애편지를 써보시오.’아르헨티나 조각가 아드리안 빌라 로야스의 지시문을 받아든 그는 관객들에게 비밀번호 작명과 관련된 사연을 듣고 이를 그림으로 그려 준다. 박혜수 작가는 프랑스 여성학자 엘렌 식수의 ‘꿈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라’는 지시문을 받아들곤 타이핑기를 설치했다. “예술가, 디제이, 돈 좀 있는 사람…” 누군가 타이핑한 꿈들이 종이에 찍혀 천장으로 올라가도록 설치돼 있다.
지난 3월 모집한 아마추어 공모단도 작업에 참여했다. ‘빨강 노랑 파랑의 다른 선들은 검정색 선 위아래로 벽의 꼭대기부터 그린다’. 미국의 미니멀리즘 조각가 솔 르윗의 지시문을 받아든 아마추어들은 일루전이 있는 멋진 벽화를 만들어냈다.
미술이란 무엇인가. 여전히 미술은 회화이거나 조각이라는 고답적 생각을 갖고 있는 관람객이라며 가서 보라. 고루한 미술 개념을 크게 흔들어볼 것을 권한다. 7월 9일까지(02-2020-2050).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
20여년 이어진‘do it’전시 한국 왔다
입력 2017-05-02 0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