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FTA 재협상? 종료?… “기선잡기 엄포용”

입력 2017-04-29 05:03

미국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압박’이 강도를 더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종전에는 언급하지 않았던 ‘폐기’ ‘종료’ 가능성까지 거론했다. 한·미 FTA가 존폐 위기로 내몰리자 우리 정부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다. 전문가들은 재협상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한 강수라고 분석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27일(현지시간) 로이터 통신과 가진 인터뷰에서 한·미 FTA를 ‘끔찍한 협상’이라고 지목하면서 ‘재협상’과 ‘종료’를 동시에 말했다. 기존의 재협상 입장에서 한발 더 나간 것이다. 한·미 FTA는 한쪽 당사국이 다른 당사국에 협정 종료를 희망한다는 의사를 서면으로 통보한 날부터 180일 후에 종료될 수 있다. 미국의 의지만으로 ‘FTA 폐기’가 가능하다는 의미다.

앞서 윌버 로스 미국 상무장관은 지난 25일 월스트리트저널과의 인터뷰에서 “한국과 FTA를 개정하기 위한 논의를 재개하는 것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최근 방한한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도 지난 18일 주한미국상공회의소 연설에서 “한·미 FTA를 손보겠다”고 했었다.

트럼프 대통령의 ‘폭탄발언’이 나오자 우리 정부는 부랴부랴 진의 파악에 나섰다. 산업통상자원부 관계자는 28일 “발언 취지와 배경 등 구체적인 사항을 공식 채널을 통해 확인 중”이라고 말했다. 이어 “현재까지 우리 정부는 미국 측으로부터 FTA 재협상 관련 공식 요청을 받은 바 없다”고 덧붙였다. 산업부는 이날 오후 3시 이인호 통상차관보 주재로 관계부처 합동 통상현안점검회의를 연 데 이어 오후 4시에 주형환 장관 주재로 2차관, 통상담당 실국장과 자체 점검회의를 가졌다. 그동안 ‘관망’에 무게중심을 두던 정부 입장이 긴박함 쪽으로 한발 움직인 것이다.

만약 한·미 FTA가 폐기된다면 어느 정도 충격이 있을까. 한국과 미국 모두 무역수지 악화를 감수해야 한다. 산업부는 한국의 대미(對美) 수출이 13억 달러 줄어들고, 미국의 대한(對韓) 수출은 15억 달러 감소할 것으로 추산한다.

이 때문에 우리 정부 내부에선 이번 발언을 ‘협상용 포석’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경제부처 관계자는 “미국 의회가 트럼프 대통령의 극단적인 통상정책에 힘을 실어줄지는 두고 봐야 한다”며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의 대통령 궐위 상황을 이용해 협상력을 높이려는 의도의 강수를 던졌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도 한·미 FTA 폐기 발언은 엄포용 성격이 짙다고 본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한·미 FTA는 미국에도 이익이기 때문에 실제로 폐기에 나설 가능성은 높지 않다”면서 “우리 정부는 상당한 수준의 재협상에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제현정 한국무역협회 연구위원은 “우리가 대선을 앞둔 시점에 일종의 위협용 카드를 일단 꺼낸 것으로 보인다”고 진단했다. 다만 제 연구위원은 “재협상 결과에 따라 FTA 개정 수준에 그칠 수 있지만 미국이 원하는 것을 우리가 주지 않을 경우 FTA 자체가 폐기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우려했다.

세종=유성열 기자 nukuva@kmib.co.kr, 그래픽=박동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