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깨어난 적이 언제였더라. 시드니의 아침, 몇 천년은 족히 그 자리에 있었을 법한 아름드리 나무들에 둘러싸여 이 글을 쓴다. 지극히 ‘비현실적인’ 풍경 앞에서 쓰는 글인 만큼 어쩌면 ‘헛소리’에 불과할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지금 이곳에서 만난 어느 목사의 딸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이민 20년차인 그는 딸만 셋을 두었다. 첫째 딸과 둘째 딸은 다섯 살 터울이고 둘째 딸과 셋째 딸은 1년 반 터울인데 막둥이의 발육상태가 워낙 좋아 바로 위 언니보다 덩치가 훨씬 크다.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에 따르면 이런 경우에는 대개 맏딸이 희생적일 것으로 예측되나 예외는 항상 있는 법이다. 가만히 있어도 강력한 권위를 내뿜는 맏이와 고집쟁이에다 자기보다 힘이 더 센 막내 사이에 끼여서 둘째가 맨날 양보하는 역할을 맡게 됐다.
흥미로운 것은 다음 대목. 보통은 ‘피해자 의식’에 사로잡혀 자기 처지를 비관하거나 불평하기 일쑤이련만 둘째는 자신의 존재론적 좌표를 적극 활용해 두 강자 사이에서 용케 세력 균형과 조화를 이루면서도 묵묵히 자기 길을 가는 지혜를 발휘했다. 늘 손해만 보고 희생만 하는 듯싶었는데 어느 순간 맏이와 막내가 둘째의 말을 경청하는 것이었다.
공부도 탁월하게 잘해 우수한 성적으로 시드니 법대에 합격한 둘째는 요즘 시민운동에 푹 빠져 있다. 극우 보수가 권력을 잡기는 미국이나 호주나 마찬가지여서 안 그래도 고단한 이민자들의 삶에 치명적인 위협이 되고 있는 바,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인권변호사도 좋지만 시민운동가로 활동하는 게 더 낫지 않겠냐며 틈만 나면 시위 현장으로 달려 나가는 둘째를 보노라니 ‘꼴통 목사’로 살아온 아버지는 자신의 모습이 부끄럽더란다. 이렇게 솔직할 수 있는 것도 능력이다. ‘회개’는 언제나 감동을 전염시킨다.
생각해 보면 이민자의 생리가 그렇다. 주류 사회에 진입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그럴수록 이민자 사회는 더욱 위축되는 것이 복잡한 셈법. 이민자가 힘 있는 주류와 힘없는 비주류 사이에 ‘낀’ 존재로 자신의 ‘끼여 있음’을 저주가 아닌 은총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을까. 양자의 세력 대결에 균열을 일으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낼 가능성은 언제나 ‘낀’ 자리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구약성서 사사기를 읽는다. 전쟁에 나가 큰 활약을 펼친 영웅들의 서사가 화려하다. 그 틈새에서 업적이랄 게 별로 없어 보이는 여성 사사가 두드러진다. 드보라다. 위대한 남성 사사들 사이에 ‘낀’ 그녀는 남성보다 더 많은 전공(戰功)을 세우는 방식으로 일하지 않았다. 전쟁은 남성 장군에게 맡기되 그가 전공을 독차지하지 않도록 권력 분산을 추구했다. 드보라가 무려 사십년이나 그 땅을 평화롭게 통치할 수 있었던 권위의 원천은 역설적이게도 ‘탈 권위’였다.
그러고 보면 리더에게 필요한 결정적인 자질은 이민자 의식인지도 모른다. 자신이 주류에 속해 있다는 생각과 다수를 대변한다는 생각, 기존 질서를 보수한다는 생각에 젖어있는 사람은 결코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주류와 비주류 사이에 끼여 있으면서 비록 양자로부터 욕을 먹을지라도 주류에 도전하고 비주류를 옹호하며 끝없이 기존 질서에 균열을 일으키는 사람만이 새로운 세상을 열어젖힐 수 있다.
바야흐로 정치의 계절이다. 하늘나라에서 지구나라로 이민 와 하늘시민이면서 동시에 지구시민이라는 ‘낀’ 자리를 살아가는 우리.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야 하는 소명을 어찌 잊을 텐가. ‘낀’ 자리가 희망이다. 지금 여기가 하늘정치의 최전선이다.
구미정(숭실대 초빙교수)
[시온의 소리] ‘낀’ 자리
입력 2017-04-28 00:00